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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올해 초, 기자는 한참 불볕 더위가 기승일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입성했다. 나흘을 한인민박의 지붕 아래서 라면과 김치와 함께 하는 동안 어느새 오랜 여행의 여독도 가시는 듯했다. 이어 기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현지에서의 영어교사의 길. 낮선 땅에서 그 큰 도전을 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도 막상 부딪치니 작아지는 자신을 어쩔 수 없는데...)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지금 시간을 알 것 같다. 일어날까? 아니다. 아직 시간이 있다. 밝은색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 얼굴을 기분좋게 간질이는 따뜻한 햇살. 오늘 아침은 충분히 잔 것도 아닌데 전혀 피곤하지 않다. 좋았어. 느낌이 나쁘지 않다. 오늘은 무려 대학 졸업 이후 '내 첫 등교일'이다.

나는 오늘부터 이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한달짜리 코스를 수강할 예정이다. 이 코스는 TEFL(Teaching English as Foreign Language, 이하 '테플') 자격증을 따기위해 특화된 과정이다. 테플은 국제적으로 인정해주는 영어 교사 자격증 중의 하나로 그밖에도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과 CELTA(Certificate in English Language Teaching to Adults) 등이 있다.

한달여간 'TEFL'  자격증 수업을 들었던 정든 학교의 문앞에서 찍은 한컷
 한달여간 'TEFL' 자격증 수업을 들었던 정든 학교의 문앞에서 찍은 한컷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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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이든 아니든 누구나 도전할 수 있고 이 코스에 다른 지원제한은 없다. 이 자격증과 지원자 본인의 의지가 있는 한 세계 어디서든 영어 교사로 취업이 가능한지라 전세계의 여행자들에게 그 매력은 상당하다.

테플 같은 경우에는 온라인으로도 수강이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테플 코스라도 종류가 각기 다르다. 최소 수강 시간인 120시간 코스부터 최대 240시간 짜리도 있다. 나는 아직 초보이니 120시간 짜리를 먼저 시작할 예정이다.

세수를 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데 문득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쳤다.

'이 나라에서 유색인종인 내가 정말 영어 교사가 될 수 있을까... 혹시 에이전시의 사탕발림에 홀라당 넘어가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항상 새로운 도전 어쩌구를 입에 달고 살더니 이번에 제대로 까이려냐..."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혹시 오늘 내가 마음을 바꾸면 학교에서 환불을 해줄까?'

세차게 도리질을 해본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이 팝콘처럼 탁탁 솟아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밥! 아직 뱃속이 비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묵고 있킄 한인민박 3층의 거실겸 주방으로 향한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비빔밥. 입맛 없다고 깨작깨작 먹느니 차라리 한 그릇에 다 몰아넣어 한그릇 뚝딱 하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전투적으로 밥을 비비고 순식간에 게눈 감추는 소화시켰다. 이제 배도 든든, 호스텔 식구들의 격려에 마음도 든든, 이제 교실문을 열일만 남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판 지옥철의 인산인해를 뚫고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이곳의 인구는 약 7만 명에 육박해 서울 인구에 버금간다). 며칠 전 한 번 와본 터라 헤메지 않고 잘 찾아왔다.

우리 교실은 꼭대기층에 위치한 제일 작은 교실이다.
 우리 교실은 꼭대기층에 위치한 제일 작은 교실이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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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학교 견학을 한 번 와본지라 몇 명의 직원들과 안면이 있다. 모두 위층의 스페인어 학원에서 일하는 듯했다. 널직한 4층짜리 건물 중 3층까지 이 스페인어 학원 건물이다. 3층의 작은 사무실 하나와 탕비실 그리고 맨꼭대기층의 하나 있는 작은 교실이 우리 테플 클라스가 진행될 곳이다.

4층까지 다 올랐을 때는 숨이 약간 가팠다. 숨을 다시 고르고 내 자신에게 속삭였다.

"쫄지 말자. 한국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숭덩숭덩 썰어 무김치라도 담가야지."

망설임 없이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한쪽 벽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교실이다. 미국식 억양을 가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묻고 자리에 앉기를 권한다. 내가 3번째로 도착한 모양인데 교실에 책상은 7개 정도가 더 있다. 과연 우리 반은 몇 명인 걸까? 다른 학생들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빨갛고 노란 벽의 색깔이 눈에 띄는 교실이다.
 빨갛고 노란 벽의 색깔이 눈에 띄는 교실이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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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뒤쪽의 벽은 파란색으로 전체적으로 색감이 독특하다.
 교실 뒤쪽의 벽은 파란색으로 전체적으로 색감이 독특하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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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나머지 학생들도 속속 도착했다. 수업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 반이 조금 넘어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이름은 릴라. 자신이 미국 테네시에서 왔고 여기에는 한 2년 정도 거주 중이라고 했다. 미국영어 액센트가 상대적으로 알아듣기 쉬운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그녀가 남아공이나 스코틀랜드 출신이면 개인적으로 알아듣기 힘든 영어 발음과 방언 탓에 고생했을지도 모른다. 실은 내가 가진 호주 억양도 장난이 아니기로 전세계에 소문이 자자하니 남 말할 처지는 못될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릴라는 우리에게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했다. 왼쪽부터 시작했고 내 순서는 거의 막바지다. 제각기 다른 자기 PR이 시작되었다. 다른 것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새 반 친구들의 국적만 열심히 체크했다. 우리 반은 미국인이 5명, 덴마크 사람이 1명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온 나까지 총 7명이다.

그때부터 나는 소위말하는 '멘붕'이 시작되었다. 아니, 비영어권국가 출신도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들었는데, 반의 대다수가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이다. 덴마크에서 온 여자얘도 모국어는 덴마크어이지만 생김새는 미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인은 나 하나인 너무나 익숙한 이 상황. 갑자기 그들이 조금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와중에 첫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구나.'

호주에서 다년간 살았어도 이럴 때 나의 전형적인 한국인 마인드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자격지심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세우고 입술까지 읽어보려 했다. 특정 지방 속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 뜻을 몰라서 당황했다. 물어도 되는 질문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느라 내 머릿속은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바쁜듯 했다.

내가 발표하거나 의견을 말할 차례가 되면 평소에 전혀 신경쓰이지 않던 것들까지 신경쓰였다. 발음, 단어선정에 문법까지, 평범한 오리들인 반 친구들을 따라가느라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열심히 물밑에서 발길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확실한 게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들은 이런 내 마음을 절대 모르리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도 자존심이 있어 결코 알게 하지 않을 것이란 것.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통로의 복도에도 추억이 가득하다.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통로의 복도에도 추억이 가득하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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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늘 아래서는 불볕더위를 피해 점심을 먹곤했다.
 이 그늘 아래서는 불볕더위를 피해 점심을 먹곤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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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학교가 파하고 우리는 근처의 카페로 가서 커피라도 한 잔씩 하기로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줄리엣은 자신이 잘 아는 카페가 있다며 앞장 섰다. 아직 서로 조금 어색하지만 전원이 다같이 가기로 한 것. 대부분이 자기 나라를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서 이곳 생활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이곳 현지만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모두들 들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이윽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카페 야외석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오후의 햇살과 함께 음미했다. 어느덧 우리의 주제는 덴마크인 친구와 나의 용기있는 도전으로 옮겨갔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우리가 원어민과 동급인 혹은 더 나은 실력으로 (이말을 했던 친구가 조금 과장한 듯하다) 낮선 곳에서 새로이 하는 도전이 용기 있어 보인다 했다. 영어가 모국어라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들에 비해서 '쿨'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쿨'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 그들은 그래도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갑자기 미국인 반 친구 중 하나가 영어를 제대로 배웠을 우리가 부럽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모국어라서 저절로 하는 것 뿐이지 실은 그 언어 자체의 선후관계를 잘 모른다른 것. 덴마크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미쳤다. 나는 저 친구들보다 아마 정말 '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운 오리 새끼처럼 열심히 물밑에서 발길질을 하다보면 언제가는 그냥 평범한 오리가 아닌 백조가 될 날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집을 처음 떠나 호주 서쪽으로 날아갔던 순간부터 최근의 디플로마 과정 졸업(준학사)까지, 지난날 영어와 씨름했던 지난 수 없이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저들은 원어민이라서 가진 장점만큼에 반비례하는 단점도 있을 테고 나는 비원어민 스피커로서 보유한 나만의 강점이 있다.

'아마 나는 이미 백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안에 자리한 못생긴 열등감이 나를 미운 오리 새끼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른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기 자신을 믿고 끝없이 격려해도 모자랄 판에 매분매초를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오랜만에 밖에서 마시는 커피맛은 나쁘지 않았다. 커피잔을 입으로 갖다대다 덴마크 여자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향해 엄지를 내보였고 입모양으로 이렇게 속삭였다.

"We can do it!"
(우리는 할 수 있어.)


나도 입모양으로 '예스'를 외치며 그녀를 향해 똑같이 엄지를 내보였다.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지 배시시 웃었다. 동지가 생긴듯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올해 2월, 우리는 그저 똑같은 시작점에 서있을 뿐이다.

- 지난 2월 말, 학교 근처 카페에서.


태그:#남미, #아르헨티나, #도전, #해외취업,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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