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02 12:09최종 업데이트 19.06.25 15:32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스물다섯 나이에 세상을 뒤흔든 거사를 일으킨 청년. 세상은 그를 '천하영웅'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How are you 임정> 취재팀은 청년 윤봉길을 더욱 특별하게 담고 싶었습니다. 임정투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드론을 공중에 띄웠습니다. 
 

루쉰공원 내 윤봉길 의사 사진 루쉰공원(구 홍커우공원) 정문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중앙 무대 우측 편에 자리 잡은 걸 확인할 수 있다. ⓒ 김종훈



그런데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지와 관련된 내용, 현재 윤 의사의 의거지로 알려진 곳은 루쉰공원 안쪽에 자리한 매원(梅園) 입구입니다.


입장료 15위안(우리돈 2500원)을 내고 들어가면 한자로 된 '윤봉길의거현장'이라 쓰인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의거를 일으킨 현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 당일 2만여 명의 일본인들과 군인들이 운집했습니다. '윤봉길의거현장'이라 표시된 매원, 솔직히 2만여 명의 인파를 수용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현장은 일본군의 사열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는데 윤 의사 의거 현장 표지석이 있는 매원 입구엔 길 따라 작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지라고 하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진짜 의거 현장은 어디일까?

1932년 4월 29일,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일제에 악몽 선사한 곳은 어디일까? 

지금의 루쉰공원을 자세히 둘러봤다면 '아 거기'라고 할 공간이 하나 있습니다. 실제로 루쉰공원 안에서 2만여 명의 인파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딱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바로 <아Q정전>의 저자 루쉰의 동상이 앞에 있는 광장입니다. 지금은 펜스가 둘러쳐 있어서 이곳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없지만, 공원 내에서 매원을 향해 걷다보면 만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윤 의사의 의거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실제로 임정팀이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확인해보니 루쉰공원 중 그곳만이 유일하게 너른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루쉰공원 드론으로 윤 의사의 의거 현장을 확인했다. 가운데 보이는 너른 공간이 루쉰공원 내 유일한 광장이다. ⓒ 김종훈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입니다. 왜 중국 시민들은 매원 입구에 '윤봉길의거현장'이라는 머릿돌을 세웠을까?

답은 한성여고 교사인 김태빈 선생님의 책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태빈 교사는 자신의 답사기에서 "윤 의사의 의거 현장 표지석 자리엔 원래 윤 의사 의거로 사망한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탑이 있었다"며 "일제 패망 후 상하이 시민들이 탑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윤 의사를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걸린 편액도 2009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매정(梅亭)에서 매헌(梅軒)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윤봉길 의거 현장 루쉰공원 내 매원에 입장하면 바로 앞에 놓인 '윤봉길의거현장' 표지석을 볼 수 있다. ⓒ 김종훈



청년 윤봉길, 일본에 비수를 꽂다

1932년 1월, 일본은 '1차 상하이사변'이라 이름 붙은 물리적 충돌을 일으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일본의 만주국 설립으로 중국 내 반일 감정이 절정에 닿던 시점에 일본인 승려들이 상하이 시내를 활보하다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해군과 항공부대 등을 기습적으로 상하이에 상륙시킵니다. 중국 국민당군이 맞섰지만 무기력하게 밀려났고, 상하이는 일본군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됩니다.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만주를 침략당한 뒤 바로 상하이까지 침략당하는 수모를 겪은 겁니다.

윤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1932년 4월 29일은 일본이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고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하는 자리였습니다. 일본은 대규모 사열로 자신들의 힘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거사 전 사흘 전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가 거사 3일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찍은 사진이다. 현장의 사진을 핸드폰 카메라로 직접 담았다. ⓒ 김종훈



윤 의사는 비록 현장에서 체포되지만 그의 의거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윤 의사 의거 후 당시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의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용사 한 명이 해냈다"며 김구 선생에게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고 실천합니다. 

윤 의사의 의거가 더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가 있습니다. 윤 의사의 폭탄 의거로 사망하거나 다친 인물들의 면면 때문입니다. 윤 의사가 군인들의 경계를 뚫고 던진 폭탄이 단상 위에서 터진 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이 사망했습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특히 오른발이 잘린 주 중국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한 명 한 명이 대단했던 '영웅'들이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윤 의사와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만 짚고 가겠습니다. 바로 '의거 당일 윤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윤 의사는 1만여 명의 군인들이 만들어놓은 경계망을 순간적으로 무너뜨리고 '물통형' 폭탄을 던져 의거에 성공한 겁니다. 이후 도시락 폭탄을 터트렸으나 불발돼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끌려가는 윤 의사, 80년째 반복되는 사진 진위 논란

윤 의사의 의거와 관련해 수십 년째 논란이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의거 성공 후 끌려가는 윤 의사의 모습입니다. 

이날 윤 의사는 김구 선생으로부터 미리 받은 도시락 폭탄과 물통형 폭탄을 휴대해 이른 아침 훙커우공원에 입장했습니다. 11시 50분 홍커우공원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자 윤 의사는 과감하게 물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힘차게 던졌습니다. 이어 도시락 폭탄을 터트리려했으나 불발, 이어진 것은 윤 의사를 향해 쏟아진 엄청난 구타였습니다. 윤 의사는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 도쿄 아사히신문 특파원 사토우가 촬영한 윤봉길 의사 연행 장면. 윤 의사 의거 장면이 '호외판'으로 5월 1일 가장 먼저 발행됐다. 지금까지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매헌기념관에 전시된 사진을 영상으로 찍어 캡처했다. ⓒ 김종훈



실제로 거사 사흘 전인 1932년 4월 26일에 찍힌 윤 의사의 모습과 거사 후인 4월 29일 정오 무렵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윤 의사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이 1932년 5월초에 공개했는데, 지금까지도 진위 여부를 놓고 두고 논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루쉰공원 내 윤 의사의 기념관에도 '윤 의사가 거사 후 끌려가는 장면'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임정팀 내부에서도 사진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얼굴이 바뀌었다"며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도 윤 의사의 호방한 얼굴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계를 비롯해 언론에서는 지속적으로 '윤 의사가 끌려가는 사진은 날조된 것'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주 매헌기념관장은 2015년 윤 의사의 연행 장면이 다시 논란이 되자 '윤 의사가 끌려가는 사진 속 인물은 윤 의사가 맞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사진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임정팀이 주목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윤 의사는 의거 성공 후 일본 군인들에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상하이타임스>가 4월 30일자 기사에 실었습니다. 내용 중 일부입니다.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구타를 당한 채 끌려간 윤 의사는 1932년 11월 일본으로 압송돼 총살당할 때까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습니다. 지금 돈으로 현상금 300억원이 걸린 김구 선생과 관련되 정보를 캐고자 일제는 윤 의사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윤 의사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김구 선생은 상하이 피치 목사 집을 거쳐 자싱 주보성 선생의 일가에 몸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1932년 윤 의사는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에서 순국합니다. 어쩌면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고국에 들어와 가장 먼저 박열을 통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유해를 가장 먼저 수습하게 한 건 이 때문일 겁니다. 윤봉길 의사가 그랬듯, 김구 선생도 윤 의사와의 의리를 마지막까지 지켰습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장소 원창리 13호

사실 윤 의사와 관련해 임정팀이 확인하고자 했던 장소는 또 하나 있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지 훙커우공원도 특별하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또 하나의 장소, 바로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입니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곳 원창리 13호 1932년 4월 29일 이른 아침,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이곳 원창리 13호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들어가서 오른쪽 첫번째 집으로 추정된다. How are you임정팀이 현장을 담는 동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 김종훈



김구 선생은 윤 의사와 이별하는 날, 그냥 보내기가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는 '새벽에 윤군과 같이 김해산의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윤군과 식탁을 같이하여 아침밥을 먹었다. 윤군 기색을 살피니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며 다시 한 번 윤 의사의 불같은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마음을 나눴습니다. 이어진 장면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탄생합니다. 

"일곱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리자,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게 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 따라 6원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제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훙커우공원으로 향하는 윤 의사를 향해 김구 선생은 "훗날 지하에서 만나자"는 목 메인 소리만 뱉었습니다.
 

2018년 6월 상하이, 원창리 앞 거리 김해산 집을 나온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은 이길 어딘가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몇 시간 뒤 윤 의사는 훙커오공원에서 역사에 길이남을 거사에 성공한다. ⓒ 김종훈



지난 6월 20일 임정팀이 원창리 13호를 찾았을 때도 비가 많이 쏟아졌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순국한 애국지사들을 만나러 갈 때면 왜 이리도 비가 많이 오는지. 그날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86년이라는 간극을 뛰어넘어, 윤 의사와 김구 선생이 마지막으로 식사했다는 원창리 13호의 집을 들어가 봤습니다. 옛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중국인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여기에 한국인들이 살았냐'고 물었더니 당황해하며 "그런 건 모른다"는 답만 합니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이번 <How are you 임정>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항상 느끼게 되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집니다. 

원창리 13호는 표지석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취재 준비할 때부터 듣고 왔습니다. 원창리를 관리하는 아저씨도 '한국인을 본 기억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걸음은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윤 의사와 김구 선생이 시계를 교환한 원창리 13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매원에서 띄운 드론 청년 윤봉길의 기록만큼은 보다 다르고 멋지게 담고 싶었습니다. ⓒ 김종훈



루쉰공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매헌기념관에 갔을 때 관리인에게 직접 물으니 "근래 들어선 하루에 오십 명도 오지 않는다"며 "청년층은 거의 볼 수가 없다"고 전했습니다. 가끔씩 '단체관광 올 때를 제외하곤 이 숫자도 유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걷지 않으면 길은 사라집니다. 수만리 떨어진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기억되는 건 청년 윤봉길을 기억하고 쫓는 시민들의 꾸준한 걸음 때문입니다. 중국이 언제까지 윤 의사의 기억을 기록하고 유지할 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 글을 본 당신이 '천하영웅' 윤봉길을 함께 기억하고 기록해주기를 소망합니다.

(오마이TV 김종훈, 정교진, 김혜주 기자, 최한솔 시민기자)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윤봉길 의사 임정투어 정보
1. 윤봉길 의사 의거지

상하이 지하철 3호선 훙커우축구장(虹口足球)역에 내려서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을 보면 바로 옆에 훙커우공원이 보인다. 좌든 우든 길 따라 걷다보면 훙커우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공원에 입장한 뒤 중간에 위치한 매원(Plum Garden)을 향하면 그곳에 바로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매헌'이 있다. 입구에서 입장료 15위안(2550원)을 지불해야 한다. 입장 후 50m만 걸어가면 매헌기념관 1층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의 동상을 계단에서부터 볼 수 있다.

구글지도 활용법

구글에 '海市 虹口区 四川北路 2288号'를 입력하거나 '鲁迅公园'을 입력하면 정확한 위치가 금세 표기된다. 지하철이 번거로울 경우, 시내에서부터 루쉰공원(鲁迅公园)을 목적지로 해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3~4인인 경우 추천한다. 

누차 강조하지만 구글지도와 한국의 소셜네트워크를 중국에서 사용하기 위해선 'VPN앱'을 한국에서부터 미리 다운받아 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구글지도는 VPN이 설치되지 않는 경우,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다. 미리 준비하자. 계속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2.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이별한 곳, 원창리 13호

두 번째 에피소드 신규식 선생 편에서 밝힌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구글지도에서 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와,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이별의 정을 나눈 원창리 13호를 비교하면 두 지점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윤 의사와 김구 선생의 이별 장소 역시 지도에 정확하게 표기한 뒤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원창리 13호는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淮海中路/Huaihai Middle Road)역과 1호선 황피남로(黃陂南路/Huangpi South Road)역 중간에 위치해 있다. 회해중로역 1번 출구를 나와 황피남로역 방향으로 가다보면 양당로(Yang dang Rd)가 나온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300미터 내려가다보면 우측에 '원창리'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집이 원창리 13호다. 예관 선생의 집과 마찬가지로 원창리 13호는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인 서금이로와 두 번째 청사 추정지인 회해중로 H&M 건물과 모두 10분 거리에 있다. 

구글지도 활용법

'上海市 卢湾区 雁荡路 56弄 13-46号 邮政编码'를 입력하면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이 곳은 독립기념관에서 운용하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 윤 의사의 행적을 쫓고자 하는 몇몇에 의해서만 확인되고 전해진 곳이다. 정확한 주소를 지도에 입력한 뒤 역에서 내려 지도를 따라 걷다보면 가게 사이로 '원창리' 표지석이 보인다. 입구에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어만 가능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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