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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 6월 9일, 겸재 정선은 청하현 현감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겸재의 그림은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고, 진경산수화풍을 완결 짓기 일보 직전이었다. 청하현(지금의 포항)은 겸재가 동해안을 따라 관동팔경을 마음껏 사생할 수 있는 최적의 부임지였다.

당시의 사생을 바탕으로 겸재는 1738년 가을에 <관동명승첩> 11편을 그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그 즈음인 1734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쌍계입암雙溪立岩>이다.

<쌍계입암>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서석지의 관문이자 외원에 해당하는 석문 일대를 그렸다.
▲ 쌍계입암 <쌍계입암>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서석지의 관문이자 외원에 해당하는 석문 일대를 그렸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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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입암(立巖, 선바위)을 그린 진경(眞景)이다. 하늘로 솟구치다 못해 휘어져버린, 거칠 것 없는 입암의 기세와 그 아래를 흐르는 사나운 물살의 역동감에 압도당할 만한 그림이다. <영양현읍지>에는 쌍계입암이 '석문입암石門立岩'으로 표기되어 있다.

석문입암은 예로부터 빼어난 명승이었다. 일월산의 동쪽에서 흘러온 반변대천과 서쪽에서 흘러온 청기천 두 시내가 합수되는 곳에 자양산과 자금병의 두 석벽이 마주 서 있어 거대한 석문 형상을 하고 있다. 겸재가 이곳을 찾기 100여 년 전, 이 석문 일대를 거대한 별천지로 인식하고 임천정원을 조성한 이가 있었다. 대조원가(大造園家) 석문 정영방이었다.

그는 이 일대를 10여 년간 관찰한 끝에 석문에서 청기천을 따라 들어가면 나타나는 핵심 공간에 서석지라는 전무후무한 정원을 17년에 걸쳐 조성했다. 이후 이 임천정원은 양산보의 소쇄원, 윤선도의 부용동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민간 정원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서석지가 있는 입암면 연당마을의 동구에는 선돌과 남이포가 있다.
▲ 남이포 서석지가 있는 입암면 연당마을의 동구에는 선돌과 남이포가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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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공간

고즈넉한 마을의 한복판.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공간이 얼핏 보인다. 담장 너머 왼쪽으론 검은 기와지붕이 언뜻 솟아 있고, 그 옆으론 회색빛 옆모습을 드러낸 작은 출입문이 나 있다. 오른쪽 담장 모퉁이에는 이 모든 걸 가릴 정도로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그 사이사이로 멀찌감치 마을을 둘러싼 부드러운 산 능선들이 아른거린다.

담장은 얼핏 낮은 듯한데 쉽게 안을 들여다볼 순 없다. 누구든 문 앞 작은 마당에서 잠시 기다려야 한다. 오랜 은행나무와 쇠락한 담장, 작은 일각문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은 묘한 긴장감을 준다. 막상 문을 열었을 때 안이 훤히 보이는 당황스러움을 모면하려면 정면이 아닌 측면에 출입문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라면 누구든 이 작은 기다림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내 깨닫게 된다. 이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안의 주인이나 밖의 손님은 서로의 인기척을 느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잠시나마 여유를 갖게 된다.

고즈넉한 마을의 한복판에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 서석지 고즈넉한 마을의 한복판에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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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인 사주문을 들어서서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은 영귀제이다.
▲ 영귀제와 주일재 출입문인 사주문을 들어서서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은 영귀제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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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인 사주문(四柱門)을 들어서서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은 영귀제(詠歸堤)이다. 연못이 정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석지에 유일하게 여백으로 남은 공간이다. 마당에 점점 박혀 있는 디딤돌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경정으로 이어지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의 사우단과 주일재를 지나 행단과 연못의 서석들이 시선에 들어온다.

상서로운 돌의 연못

서석지(瑞石池)는 말 그대로 상서로운 돌의 연못이다. 연못의 물은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읍청거(挹淸渠, 맑은 물이 뜨는 도랑)로 들어와서 대각선의 맞은편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토예거((吐穢渠, 더러움을 토하는 도랑)를 통해 나간다. 읍청거는 드러나 있지만 토예거는 감추어져 있는데, 이것은 나가는 물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풍수설에 따른 것이다.

서석지(瑞石池)는 말 그대로 상서로운 돌의 연못이다.
▲ 서석지 서석지(瑞石池)는 말 그대로 상서로운 돌의 연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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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물은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읍청거로 들어와서 대각선의 맞은편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토예거를 통해 나간다.
▲ 읍청거와 서석들 연못의 물은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읍청거로 들어와서 대각선의 맞은편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토예거를 통해 나간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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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건 연못 가운데에 섬이 없다는 것. 조선 시대에 축조된 대부분의 연못은 가운데에 섬이 있는 네모난 모양인 데 비해 서석지는 중도가 없는 방형 연못이다. 연못을 파고 석가산을 쌓아 가운데에 섬을 만드는 일반적인 조성과는 달리, 서석지엔 원래 있던 기이한 형상의 암반을 그대로 연못의 정원석으로 활용하는 절묘한 수법을 썼다.

경정(敬亭)은 연못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다. 옥성대 위에 지었는데, 건물이 다소 위압적으로 보일 정도로 정원 전체의 중심 공간이다. 경정에선 곧장 연못을 드나들 수 없다. 정자 앞으로 계자난간을 두른 데다 연못 쪽으로 정자가 바짝 붙어 있어 정자와 연못 사이의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정자 옆을 통해서만 연못을 드나들 수 있다.

경정은 옥성대 위에 지었는데, 건물이 다소 위압적으로 보일 정도로 정원 전체의 중심 공간이다. 경정에선 곧장 연못을 드나들 수 없다.
▲ 경정 경정은 옥성대 위에 지었는데, 건물이 다소 위압적으로 보일 정도로 정원 전체의 중심 공간이다. 경정에선 곧장 연못을 드나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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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은 회화적, 상상적으로 정원을 완상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연못을 따라 거닐며 시를 읊는 서석지에서 중요한 공간이 된다.
▲ 경정 경정은 회화적, 상상적으로 정원을 완상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연못을 따라 거닐며 시를 읊는 서석지에서 중요한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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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아 경정은 연못을 완상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정 앞으로는 신선계가 펼쳐지니 범인이 들어설 수 없는 신선의 영역이다. 현실 세계에서 신선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오직 꿈과 같은 상상 속의 걸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경정은 회화적, 상상적으로 정원을 완상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연못을 따라 거닐며 시를 읊는 서석지에서 중요한 공간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경정에 오르면 서석지가 있는 내원이 한눈에 보이고 서석지를 둘러싼 외원 풍경까지 들어온다.

흥미로운 사실

경정에 올라 정원의 배치를 보면 서석지의 공간이 뚜렷하게 들어온다. 경정과 연못, 행단이 종축을 이루고, 주일재와 사우단, 영귀제가 횡축을 이룬다. 경정에서는 풍경과 상상의 공간 위주로 축이 구성됐다면, 주일재에서는 도학과 생활에 깊이 침잠할 수 있도록 축이 설계된 것이다. 경정은 신선의 삶을 완상하며 즐기는 공간으로, 주일재는 자연의 네 벗과 생활하는 공간으로, 영귀제는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정(敬亭)은 연못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는데, 연못을 완상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경정에서 본 풍경 경정(敬亭)은 연못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는데, 연못을 완상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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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는 경정과 연못, 행단이 종축을 이루고, 주일재와 사우단, 영귀제가 횡축을 이룬다
▲ 경정과 주일재 서석지는 경정과 연못, 행단이 종축을 이루고, 주일재와 사우단, 영귀제가 횡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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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석지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서석지는 마을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이 높고 서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낮아지다가 동쪽이 가장 낮다. 이러한 지형의 영향으로 주요 시선은 경정에서 동쪽 담장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은 서석지 밖에 있는 외원의 주요 경관을 차경할 수 있도록 동남쪽 담장의 높이를 낮게 조절함으로써 경정에서 서석군을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멀리에 있는 경관마저 시각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이곳을 밝고 아늑한 곳으로 느끼게 한다. 거기다 연못의 가로세로 비율을 달리하여 변화를 꾀했다. 연못의 동서 길이가 남북보다 긴 1:1.2의 비율이다. 이것은 서쪽에 있는 경정에서 연못을 내려다볼 때의 시선이 동쪽 방향이어서 동서가 길어야 눈으로는 연못이 정사각형의 안정된 형태로 보이고, 동시에 경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석을 내려다볼 수 있다.

- 서석지는 다음 편에서 계속


태그:#서석지, #임천정원, #주일재, #쌍계입암, #정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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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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