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 5일 오후 서울 성북구 안암역 앞에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 5일 오후 서울 성북구 안암역 앞에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내세운 녹색당 신지예 후보가 1.7%의 득표율(8만2874표)로 4위를 기록했다. 박원순, 김문수, 안철수 후보 다음으로 원내정당인 정의당의 김종민 후보(1.6%)를 앞섰다. 0.5% 이하 득표율을 기록한 다른 소수 원외정당 후보들과 비교해서도 압도적으로 좋은 성적이다.

물론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과반 득표율로 당선한 상황에서 1.7%는 아주 미미한 수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신지예'의 존재는 숫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들을 남기며 우리에게 '페미니즘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아재 정치판'에 뛰어든 20대 여성 정치인

'지방선거 여성잔혹사'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반복됐다. 당선자 중 여성 광역단체장은 한 명도 없고, 여성 기초단체장은 8명으로 그마저도 지난 2014년 지방선거(9명)에 비해 감소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 것이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자 수 자체가 매우 적었다.

광역단체장 후보 71명 중 여성은 총 6명으로 8.5%에 불과했고, 기초단체장 후보 226명 중에서는 조금 더 많은 35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 여성 후보를 단 한 명도 공천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지만, 역대 첫 여성 광역단체장이 나올 수 없었던 이유다.

이렇게 여성 후보가 부재한 가운데, 신지예 후보는 광역단체장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했다. 40, 40대 이상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정치의 영역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저는 당신이 운전도 못 하고 애도 안 키워본 여자가 무슨 정치하냐고 할 때, 1종 보통 면허에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근데 그게 정치랑 무슨 상관이냐고 당당하게 받아칠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밥상 한 번 안 차려 본 당신의 그 꼰대 정치를 뒤엎으러 나왔다, 이렇게 똑바로 이야기 할 바로 그 젊은 여자입니다." - 신지예 후보 출마선언 영상 중

우리는 신지예 후보를 통해 '기성 정치인'에 대한 틀을 깨고, 다양한 모습의 정치인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젊은 여성'도, 나아가 우리 사회의 평범한 누구나가 정치인이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페미니즘 이슈를 정치적 의제로 만드는 것

낙태죄 문제와 관련한 신지예 후보의 선거 현수막
 낙태죄 문제와 관련한 신지예 후보의 선거 현수막
ⓒ 녹색당

관련사진보기


페미니즘은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화두다. 2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여성혐오'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고, 올해 초 시작된 미투 운동은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한지를 증명했다. 또, 지난 주말에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는 무려 4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여했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페미니즘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나날이 늘어가는 데 반해 유독 정치의 영역에서는 이 이슈가 심도있게 다뤄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신지예 후보가 선거기간 내내 강조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슬로건에는 이러한 페미니즘 이슈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

"저는 이번 선거를 통해 여성이 얼마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지, 또한 여성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화장실과 밤길을 걷는 여성의 공포를 정치가 풀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남성 중심적 정치와 타협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의 정치가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갖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가 서울시민께 드리는 편지 중

신지예 후보는 서울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 성평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서울시와 계약을 맺는 모든 기업, 단체가 '성평등 이행각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성평등 일터 인증제'를 도입해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돌봄노동을 완화하기 위해 남성의 육아휴직을 장려하는 '독박육아방지조례'를 도입하고, 서울시 운영병원 산하에 '젠더건강센터'를 신설해 공공의료체계에서 배제되는 여성 이주민과 자녀들을 지원하는 정책도 있었다.

또, 신지예 후보는 선거기간 동안 불법촬영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현수막을 마포경찰서와 서부지방검찰청에,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헌법재판소 주변에 게시했다. 선관위 검인을 받은 현수막은 지방선거가 끝나는 6월 13일까지 함부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활용해 불법촬영과 낙태죄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고 움직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법적·제도적인 토대를 만들고 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정치의 영역에서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신지예 후보는 2018년 한국 사회의 가장 일상적이고 뜨거운 문제인 페미니즘을 정치 의제로 가져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다.

페미니스트 정치인, 백래시에 맞서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이 여성 후보에게 지지만큼이나 쏟아지는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강남구를 비롯한 서울 곳곳에서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가 훼손됐는데, 그중에는 눈 부위를 파거나 담뱃불로 지진 경우도 있었다. 선거 현수막 중 일부도 끈이 풀리거나 가운데가 잘리는 등 훼손되기도 했다. 모두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하는 범죄다.

온라인상에서의 '사이버 불링'도 계속됐다. 한 변호사는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를 두고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다"라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시장 후보조차 너무나 쉽게 공격 대상이 되는 사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분노했던 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 반격)와도 결코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격들에도 굴복하지 않고 맞선 신지예 후보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정치를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공격과 백래시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페미니즘 정치의 시작점에서

이번 선거에서 신지예 후보의 행보는 비단 서울시 유권자만이 아니라 타 지역의 젊은층 유권자들과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층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19세 미만 청소년들이 참여한 한 모의투표에서는 신지예 후보가 36.6%로 33.3%의 박원순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신지예 후보가 내세운 페미니즘 정치가 지금 젊은 세대의 시대적 요구를 가장 잘 반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지예 후보는 "한국 페미니스트 정치의 시작점이 제로가 아니라 1.7%"라며 "페미니즘 정치는 이제 시작"이라고 밝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평범한 나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만나고, 페미니즘 정치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지예 후보 덕분이다. 그 시작점을 멋지게 열어준 그를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기를, 그리고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현실로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


태그:#신지예, #녹색당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의 변화는 우리네 일상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파도 앞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