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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의 왕을 죽이고 싶었다>
-사라 키어쉬

나의 왕을 죽이고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가 팔찌를
내게 줬을 때, 내 예쁜 이름을
지워 버렸고, 내가 만든 문장들을
던져 버렸다: 그의 눈빛을
목소리와 혀로 저울질하고
나는 텅 비워진 병에 폭발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 이건 그를
영원히 쫓아낼 수 있어야만 했다. 그걸로
반란은 완전해질 수 있을 것이고
내 뒤로 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곳곳에서 형제애를
나누었을 것이다 – 하지만
자유는 더 커지려 하지 않았다
영혼이 부르주아의 한 조각으로
머물렀을 뿐 아니라, 더 물러졌으므로
내가 춤추는 동안
내 머리는 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나는
그에 대한 뒷소문이 있는 나라로 떠났고,
세 권의 과실, 한 뭉치의 불법을
모았으며, 심지어 거짓말도
밝혀 냈다. 가장 마지막에는
그를 그저 폭로하고 싶었다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다
나의 왕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 입맞춤했다

독일 시인 사라 키어쉬(Sarah Kirsch, 1935-2013)의 시 "난 나의 왕을 죽이고 싶었다(Ich wollte meinen König töten)"를 읽어 보자. 이 시의 도입부는 '나는 나의 왕을 죽이고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는 자유를 갈구하는 어떤 이의 절규로부터 시작한다.

이 시의 화자는, 그가 팔찌를 주고 나서부터, 예쁜 이름을 버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고, 하고픈 말을 더이상 주체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하면서 사유의 자유로움마저도 억압당했다고 회고한다.

왕이 시의 화자에게 줬던 팔찌는 더이상 글을 쓰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묶어두는 수갑이었을 수도 있고, 사랑의 표시로 선물한 장신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시의 화자가 그 팔찌를 과연 기쁘게 받았는지,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이 시에서 읽어낼 순 없다. 어쨌거나 본인의 선택이었는지 왕의 강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의 여자'가 된 화자는 큰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자유를 갉아먹는 왕을 죽여야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려 한다. 하지만 결국 왕을 죽이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 암살 실패의 원인을 자신이 이미 물질적인 안락함에 너무 물들어 버린 탓이라며, 시에서는 화자의 영혼을 부르주아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화자는 나약해져버린 자신을 탓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왕을 찾아 나선다.

이번에는 이전의 반란 시도에서처럼 급하게 폭발물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그의 악행들을 증거로 수집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화자가 왕을 다시 마주했을 때, 그를 향한 애증의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육체적 죽음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화자는 왕을 그곳에서 즉시 죽이는 대신, 보란 듯이 다른 사람에게 키스를 했고, 그렇게 시는 끝난다.   

만약 이 시를 어느 남자 시인이 썼다면, 아마도 새로운 사회 변혁을 향한 민중시로 읽히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주인이 70년대 동독에 살았던 여성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유를 향한 갈망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에 대한 의지까지도 읽어내야만 한다. 그가 시에서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던 그의 왕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시를 쓴 사라 키어쉬는 30년대 나치 독일에서 잉그리드 번슈타인(Ingrid Bernstei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후 동료 시인 라이너 키어쉬(Rainer Kirsch)를 만나 결혼하면서 성씨를 번슈타인에서 키어쉬로 바꿨고, 나치가 통치하던 제3제국에서 공공연하게 퍼져있던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면서, 이름마저도 잉그리드에서 사라로 바꿔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잉그리드 번슈타인으로 세례를 받고 태어났지만, 사라 키어쉬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며 살았다. 이후, 라이너 키어쉬와 이혼하고, 동독에서 문학가로서 나름의 요직도 맡으면서 시를 계속 발표했지만, 1976년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의 부당한 국적 박탈에 제일 먼저 반대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동독에서 쫓겨났고, 결국 서독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렇게 그의 삶의 궤적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죽여 없애고 싶었던 '왕'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의 본래 이름을 숨기고 사라라는 가명을 쓰게 만든, 유대인을 공공연히 차별했던 제3제국 나치 정부였을 수도 있고,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게 당연했던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는데 무해한 범위 안에서만 표현의 자유가 용납되었던 동독 정부일 수도 있고, 짧은 결혼 생활 이후 혼자서 아들을 키워내야 했던 고단한 싱글맘의 삶의 무게였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억압들이 사라졌다면 그는 정말로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는 억압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연인 사이의 힘의 역학 관계에 비유해서 표현했지만,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1945-2012)은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혁명을 요구했다.

1970년에 발표된 그의 저서 <성의 변증법: 여성주의 혁명을 위한 사례 연구(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제적 계급에 적대적인 분석이 자본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었듯, 여러 층위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성적 불평등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통해 여성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제1장에서, 여성주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보다 더 수용 범위가 넓은 단어가 있다면 차라리 그걸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곳곳에 뿌리깊은 불평등으로 자리잡은 성의 계급(sex class)을 타파하기 위해 여성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성의 계급은 성의 생물학적 구분에 바탕하고 있는데, 여기서 남성을 생물학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여성은 성의 하위 계급에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몸을 착취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책무라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심리 상태를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주의 혁명을 위해서는 우선, 무뎌진 사회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다함께 성적 불평등의 현실을 예민하게 관찰할 것을 주문한다. 비록 우리가 인식한 것보다 문제가 더 깊고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분노나 무력감에 간단히 눈감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라도, 우리는 문제적 상황을 계속 직시하고 민감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19일과 26일에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여성 집회가 열렸고, 예상보다 꽤 많은 인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아무도 이렇게 전개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건으로부터 촉발되어, 많은 여성들이 지금까지 그러려니 수긍해왔던 불평등을 함께 부르짖게 되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려는 여성들에 대한 억압이 사라 키어쉬의 시에서 원했던 것처럼 완전히 없어질 수 있길 바라면서, 그리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주장한 여성주의 혁명의 첫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지름길과 우회로가 뒤섞여 있는 해방의 길목에 마침내 이르렀다.

* 참고 문헌
Kirsch, Sarah, 1973, "Ich wollte meinen König töten", 본문 인용된 시는 필자 번역, in Zaubersprüche, Verlag Ebenhausen.
Firestone, Shulamith, 1970, 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 Bantam Book.



태그:#여성집회,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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