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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을 조망하면 끝없이 대지가 펼쳐지고, 먼 산봉우리는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대청의 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고, 문 앞으로 봄의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에 이르게 한다.(봄)
은둔자는 소나무 숲에서 시를 읊고, 세상을 등진 선비는 대나무 숲에서 거문고를 탄다. 연꽃이 물 위로 솟아 새로 목욕한 듯하고, 대나무 잎이 비를 머금어 벽옥을 가볍게 튕기는 것 같다. 시냇가 물굽이에서 대나무를 감상하고 호숫가에서 물고기 노는 모습을 구경한다.(여름)
줄지어 날아가는 백로에 눈길을 주고 몇몇 단풍나무를 바라보니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활짝 열어놓은 누각에 올라 허공을 내려다보며 술잔을 드니 밝은 달이 스스로 나를 찾아온다. 하늘의 향기는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계수나무 잎은 유유히 떨어진다.(가을)
 매화를 보고 있자니 황홀하게 숲 속 달빛 아래로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서고, 눈이 천지에 가득 내리자 눈 덮인 초가집에 고상한 선비가 누워 있다. 구름빛은 어둑어둑하고 나뭇잎은 다 떨어져 쓸쓸하다. 서재 창문 아래에 누워 있던 선비는 자던 꿈 깨고서 자기 그림자를 벗 삼아 시를 읊는다.(겨울)


중국 명나라 말기의 조원가 계성이 쓴 <원야園冶> '차경(借景)' 편에 나오는 글이다. <원야>는 우리나라의 <임원경제지>, 일본의 <사쿠테이키>와 더불어 중국의 원림을 서술한 동아시아의 정원서를 대표하는 고전이다. 계성은 <원야>에서 차경을 원림 조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봤다.

동아시아에서 흔히 사용하는 차경 기법은 정원을 조성할 때 주변의 자연 풍광을 정원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수법을 말한다. 계성은 무엇보다 차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계절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원림을 조성할 때 일정한 격식은 없으나 경관을 빌리는 데에는 일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원림의 공간

임대정 원림 자연석으로 층층 돌계단이 놓여 있어 운치 있게 정자를 오를 수 있다.
▲ 임대정 원림 자연석으로 층층 돌계단이 놓여 있어 운치 있게 정자를 오를 수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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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정 원림 계성은 무엇보다 차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계절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 임대정 원림 계성은 무엇보다 차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계절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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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원림 중 계성이 말한 차경 수법이 가장 잘 드러난 원림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임대정 원림을 꼽는다. 임대정 원림을 처음 봤을 때의 다양한 공간 연출과 사방으로 들어오는 그 자연스런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임대정 원림을 찾는다면 우선 두 연못 사이로 난 흙 제방을 지나야 한다. 이 둑길은 좁지 않은데도 양 옆으로 큰 연못이 있어 묘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연못을 지나면 우뚝 솟은 언덕이 앞을 가로막는다. 잠시 마음을 조이는 사이 옆으로 비스듬히 펼쳐진 오솔길을 발견하게 된다. 오솔길엔 자연석으로 층층 돌계단이 놓여 있어 운치 있게 정자를 오를 수 있다.

임대정 원림 정작 정자는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임대정 원림 정작 정자는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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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정 원림 정작 정자는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아래 연못엔 물이 가득하다.
▲ 임대정 원림 정작 정자는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아래 연못엔 물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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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정자는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아래 연못엔 물이 가득하다. 행여 떨어질세라 돌계단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다. 잠시의 긴장이 아주 오랜 시간처럼 흘렀을 무렵 문득 앞이 훤해지며 드넓은 공간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난다. 오죽이 심겨 있는 작은 연못 너머로 고색창연한 임대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임대정 원림 오죽이 심겨 있는 작은 연못 너머로 고색창연한 임대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 임대정 원림 오죽이 심겨 있는 작은 연못 너머로 고색창연한 임대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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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의 처음

임대정 원림은 16세기 말에 고반 남언기(南彦紀, 1534~?)가 조영한 고반원(考槃園)에서 시작된다. '고반(考縏)'은 <시경> <위풍>의 편명으로 은둔하여 자연과 벗하며 자신만의 즐거움에 잠긴다는 뜻이다.

남언기는 선조 1년(1568)에 생원시에 합격하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경치 좋은 동복현 사평촌에 초려를 짓고 스스로 '고반원 주인'으로 부르며 평생을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당시에는 대(臺) 이름을 수륜대(垂綸臺)라 했는데, 대 위에서 아래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즐긴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고반 남언기는 하서 김인후에게 수학했고, 퇴계 이황과 문답하며 교유했는데, 퇴계는 그를 "동방의 도학을 전수할 사람"으로 평했을 정도였다.

수륜대 남언기는 처음 이곳을 수륜대(垂綸臺)라 했는데, 대 위에서 아래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즐긴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 수륜대 남언기는 처음 이곳을 수륜대(垂綸臺)라 했는데, 대 위에서 아래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즐긴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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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정 원림 사방 전망이 좋은 곳에 있다.
▲ 임대정 원림 사방 전망이 좋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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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300여 년이 흘렀고 이곳은 황폐해졌다. 1862년경 병조참판과 사헌부집의를 지낸 사애 민주현(1808~1883)이 낙향하여 이곳을 찾았다. 그는 사방 전망이 좋고 절벽처럼 된 언덕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고반원의 옛터 수륜대를 보고 감탄했다. 결국 그는 이곳에 초정을 짓고 연지를 만들고 수목을 심어 원림을 가꾸었다. 그러곤 주돈이의 '종조임수대여산(終朝臨水對廬山)'이라는 시구를 따서 이곳을 임대정(臨對亭)이라 했다.

이때를 <임대정기>에는 '임술조하壬戌肇夏'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1862년 초여름으로 민주현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가 이곳에 원림을 지은 이유가 <임대정기>에 나온다. 사애는 한양에 있을 때 주변의 산과 강 언덕에 즐비했던 누대와 정사를 가끔 찾았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소유가 아니다" 하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향리에 돌아와서 남언기의 수륜대 옛터를 보고,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자신의 원림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물론 한양에서 눈여겨봤던 다른 누대와 정자의 뛰어난 조경 기법을 벤치마킹하여 임대정 원림을 조성했을 것이다.

임대정 원림 민주현은 수륜대 옛터를 보고,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자신의 원림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 임대정 원림 민주현은 수륜대 옛터를 보고,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자신의 원림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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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임대정이 있는 사평리 상사마을의 최초 입향자는 민주현의 조부인 민상동(閔相東, 1737~1809)이다. 그는 능주 양정에서 이곳으로 입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현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성정을 도야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랄 데 없는 임대정의 입지 조건에 반해 이곳에 원림을 조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현이 한양에서 이곳으로 낙향한 이유에 대해선 <여흥민씨세보>에서 그 단초를 볼 수 있다.
"민주현은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에 부패한 조정에 반발하여 과거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조참판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임대정 원림 임대정 원림은 16세기 말에 고반 남언기가 조영한 고반원에서 시작된다.
▲ 임대정 원림 임대정 원림은 16세기 말에 고반 남언기가 조영한 고반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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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의 의미

예부터 <정감록>에선 이 일대를 "서쪽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사평천이 있고, 일곱 개의 산이 감싸는 평야 지대로 가히 만인이 살 수 있는 땅"이라고 했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학(鶴)의 형국으로 진산인 봉정산과 인근 일곱 개 산(정산, 운산, 월산, 송산, 화산, 검산, 절산)과 상사마을의 평야를 거느린 길지이다.

임대정이라는 이름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봉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사평천과 임하는 곳에 정자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임대정기>에 "드디어 송나라 선비의 '종조임수대여산(終朝臨水對廬山)'의 글귀를 취하여 임대로 이름 하니 그 가운데 동정(動靜)을 정히 체험하기 좋으며 이 즐거움은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며 정자 이름을 임대정이라고 한 이유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임대정은 봉정산 기슭에 위치하여 사평천에 임한 것도 있지만  "물가에서 산을 대한다(임수대산 臨水對山)"는 중국 송나라의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1017~1073)의 시구를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염계는 말년에 강서성의 여산 아래에 살았다. 여산은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읊으며 은거한 곳이었고, 왕휘지가 글씨를 익힌 곳이었고, 이태백이 은거하여 신선이 되고자 한 곳이었고, 주자가 이곳의 백록동서원에서 후진을 양성했던 명산이다.

염계 또한 여산 아래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기틀을 세웠다. 사애는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 임대정을 세워 산수를 관조하면서 세속을 잊고 성정을 닦으며, 자연을 벗 삼아 이상적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 임대정 원림은 다음 편에서 계속

임대정 원림 봄날 임대정은 흐드러진 산수유와 매화로 선경이 따로 없다.
▲ 임대정 원림 봄날 임대정은 흐드러진 산수유와 매화로 선경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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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정 원림 봄날 임대정은 흐드러진 산수유와 매화로 선경이 따로 없다.
▲ 임대정 원림 봄날 임대정은 흐드러진 산수유와 매화로 선경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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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정 원림의 구성
비 내리는 봄날 임대정에 가보라. 흐드러진 산수유와 매화로 선경이 따로 없다. 정자는 마치 절벽 위에 앉은 새 같다. 사애 민주현이 임대정 원림을 조성할 당시에 임대정은 작은 초옥이었다. <임대정기>에 "약간의 돈을 모아 한 칸 초옥을 만들어 비를 막고 바람을 가리니 멀리서 보면 버섯과 같고 일산과 같으니 사람들이 그 위에서 놀면 높은 수레 위에 앉은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정자 위는 선계이고 연못은 선계의 우주이다. 원림 앞을 흐르는 개울 사평천을 건너면 이미 다른 세상이고, 연못을 건너면 곧 선계이다.

임대정은 예전 '은행대'라고도 불렸다. <임대정기>에 "뒷날 사람들이 전하여 일컫기를 은행대라 했는데 이것은 은행나무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이외에도 <임대정기>에 "문밖의 시내 은행나무 가를 산보하면서"나 민주현의 칠언율시에 "은행나무 그늘 아래 작은 정자 새로 지어"라는 글귀를 보면 민주현이 임대정을 조성할 즈음에 계곡가나 원림 등에 은행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대정 원림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높이 4m에 달하는 언덕이 자연스레 원림 영역을 둘로 나눈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정자가 있는 수륜대를 중심으로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 공간은 크게 언덕을 경계로 언덕 위의 상원(上園)과 언덕 아래의 하원(下園)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사애선생장구지소(沙崖先生杖屨之所)'가 새겨진 표석이 있는 앞뜰(前園), 정자와 연못이 있는 내원(內園), 반달형과 원형의 두 개의 연못이 있는 지원(池園), 봉정산과 사평천, 너른 들판 등이 있는 외원(外園)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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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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