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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밀수 품목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이명희씨의 '국경 없는 행동'에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가 벌인 일들은 이제껏 그 어떤 황후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지난 13일 방송된 MBC 탐사보도 프로그램 <스트레이트>에 따르면, 그는 대한항공 직원들을 동원해 세계 각지의 제철 과일을 밀수해 맛을 봤다. 4월에는 중국의 비파, 7월에는 터키의 살구, 9월에는 중국의 대추를 밀수해 맛봤다. 이것들은 수입 금지 품목이다.

검역신고 대상 품목도 밀수됐다. 인도 망고, 우즈베키스탄 체리 등도 수입 및 검역 절차 없이 이명희 손에 올라갔다. 역사 속의 그 어떤 황후도 전 세계 제철 과일을 그렇게 신속하게 자기 입에 넣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파.
 비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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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밀수를 했다면,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양호 일가는 주주들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이해관계까지 걸린 한진그룹을 관리하고 있다. 이 그룹은 그들 일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룹 지주회사(지배 회사)인 한진칼의 전체 주식에서 조양호 일가의 몫은 4분의 1 정도다. 올해 3월 기준으로 조양호·조현아·조원태·조현민의 지분 합계는 24.8퍼센트다. 대단한 지분이지만, 과반수는 아니다. 나머지는 주주 몫이다. 한진그룹이 수십 년간 정부 특혜를 받은 점을 감안하면, 국민의 몫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족 몫을 제외한 나머지 지분에 대해 총수 일가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에 불과하다. 그런 관리자 지위를 이용해 대한항공 직원과 비행기를 밀수행위에 악용했으니 국민적 지탄을 받을 만하다. 거기다, 밀수 방지에 나서야 할 항공회사 총수 일가가 앞장서 밀수를 했으니 더욱 더 욕을 먹을 만하다.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내의 ‘아산(정주영) 기념 전시실’에서 찍은 사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내의 ‘아산(정주영) 기념 전시실’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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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밀수가 세상을 얼마나 분노케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주역인 삼성그룹 총수 이병철은 비료공장을 지을 목적으로 4200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일본 미쓰이사와 체결했다. 박정희가 이끄는 정부가 여기에 보증을 섰다.

미쓰이 측은 4200만 달러를 현금 대신 기계로 제공하는 한편, 100만 달러를 현찰로 지불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병철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동의했다. 두 사람은 그 돈을 물건으로 바꿔 국내에 반입했다. 국내 희귀 상품을 사서 밀반입한 뒤 시장에 내다팔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정권과 재벌의 합작으로 밀수된 품목이 설탕 대용인 사카린을 비롯해 전화기·에어컨·냉장고 등이다.

'눈치 없는' 세관 직원에 의해 밀수가 적발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사건이 커지지 않았다. 검찰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경향신문> 특종 보도로 온 세상에 알려졌다.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은 '또 재벌밀수'라는 제목 하에 "판본방적(방림방적)의 밀수사건을 매듭도 짓기 전에 또다시 삼성 재벌의 방계 회사인 한국비료에서의 밀수입 사건이 드러나 크게 주목된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15일 관계 소식통에 의하면 부산세관은 지난 6월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약 2천 부대(42kg 들이)를 건설 자재로 가장, 울산으로 밀수입한 것을 적발, 동(同) 물품을 압수하는 한편, 이미 벌과금을 부과 징수했다 한다. 이 소식통은 이어 부산세관은 전기(前記, 위에 적은) 밀수입품 사카린 약 2천 부대 중 5백 부대는 시중에 유출되고 나머지 1천 5백 부대만 압수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기사는 "(재무부 세관국장인) 명 국장은 밀수사건은 악질행위이나 세관 당국으로서는 재산형을 가해 세금을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이라고 덧붙였다"는 마지막 대목으로 끝난다. 밀수는 악질행위이지만 재산형 정도로 마무리됐으면 하는 정부 당국의 바람을 담은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위 특종 보도의 첫 문장은 "크게 주목된다"로 끝난다. 언론보도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기사 발표 당시만 해도 기자를 포함한 몇몇 사람 외에는 잘 모르는 사건인데도 그런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에는 그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재무부 세관국장의 말마따나 '악질행위'인 밀수를 국내 최대 재벌이 저질렀다는 사실, 그것도 대통령선거를 앞둔 집권 여당과 공모해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크게 주목'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크게 공분'했다.

10월 13일 국회에서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 명칭은 '특정재벌 밀수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였다. 삼성이라고 명확히 표시하지 않고 '특정 재벌'로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이때 총 10명인 조사위원 가운데 야당인 민중당 몫으로 배정된 4명 안에 재선인 김대중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국회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여론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연세대학교 노천강당에서는 학생 2천여 명이 '규탄하자 밀수 재벌'이 적힌 노란 리본을 달고 성토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삼성 제품 불매운동도 결의했다.

민중당·신한당 같은 야당이 전국적으로 개최한 규탄대회에도 많은 국민들이 참석했다. 10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 총재가 이끄는 신한당이 14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개최한 규탄대회에는 2만여 명이 참석했다. 대통령후보 유진오를 내세운 민중당이 다음 날인 15일 같은 장소에서 개최한 규탄대회에는 3만 5천여 명이 참석했고, 신한당이 같은 날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최한 대회에는 2만 5천여 명이 참석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공분하는 가운데, 특별한 분노 표시로 주목을 받은 두 인물이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는 15일 민중당 대구 대회에 참석해 "특정 재벌의 밀수 왕초가 바로 박정희씨"라며 비판을 가했다.

밀수의 한 축인 박정희는 실명으로 언급하면서도 또 다른 축인 삼성 이병철은 실명 대신 '특정 재벌'로만 언급한 점이 눈에 뜨인다. 위의 국회 특위 명칭도 그렇고 이 발언도 그렇고, 그 와중에도 막강했던 재벌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발언이 문제 돼 장준하는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돼 투옥 당했다.

퍼레이드 하는 김두한
 퍼레이드 하는 김두한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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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인 김두한 의원은 특별한 행동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박 정권과 삼성이 했던 것처럼 대소변을 국회의사당에 밀반입한 뒤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이 앉은 국무위원 석에 투척했다(국회 오물투척 사건). 사건 처리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김두한도 이 일로 감옥에 들어갔다. 장군의 아들의 정치 인생은 이걸로 막을 내렸다.

재벌은 책임감 있게 국민경제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그런 재벌이 지하경제에서나 하는 밀수행위를 했으니 1966년에 국민들이 그렇게 분노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그것은 악질행위로 간주됐다.

이런 것도 감안하지 않고 한진그룹 총수 일가는 대한항공을 동원해 제철 과일 등을 세계 각지에서 밀수입해 들였다. 밀수를 방지해야 할 항공회사 총수 일가가 그런 일까지 저질렀으니, 주주와 국민의 기업을 계속 맡겨둘 수 있을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태그:#한진그룹, #이명희, #밀수, #사카린 밀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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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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