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배수지, 오늘도 변함없이 배우 배수지가 3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4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배수지가 3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4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란 말이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TV에 나와 알려진 정도의 연예인이면 아무리 안쓰러워 보여도 아등바등하며 사는 서민들이 걱정할 수준은 아닐 거다. 그런데 이 훌륭한 명언에도 불구하고 요즘 본의 아니게 연예인 걱정과 응원을 하고 있다. 국민 첫사랑, 수지 말이다.   

최근 수지가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유튜버 양예원이 3년 전 피팅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수지가 사건의 수사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사실을 본인의 SNS를 통해 알렸다.

수지의 영향력으로 인해 국민청원 참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이 일이 알려지면서 '페미니즘 논란'을 거론하는 기사가 보도됐다. 그리고 수지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는 내용의 해명 글을 재차 SNS에 올렸다. 그리고 청원 글에 거론된 스튜디오의 이름은 사건과 관련이 없다며 또다시 논란이 이어졌다. 수지의 사과문이 SNS에 다시 올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지에 대한 '사형 청원'이 청와대 사이트에 올라오고 수지의 청원 인증 글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스튜디오가 수지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논란은 계속됐다.

 수지가 국민청원에 동의한 sns

수지가 국민청원에 동의한 sns ⓒ 배수지


수지를 둘러싼 많은 논란을 지켜보면서,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선 슬펐다. 수지가 청원에 동의한 사건이 여성 피해자가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많은 논란이 있었을까? 청와대 청원에 동의한 사실만으로 '페미니즘 논란'이 거론되고, 해명 글을 써야 했을까. 페미니즘은 그 자체가 논란이 되어야 하는 단어인가.

'성차별 논란'이란 말은 자연스럽지만 '페미니즘 논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인권 논란'이란 말을 우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전범기 논란', '인종차별 논란' 등의 표현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되지만 페미니즘이 왜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 논란거리라면 여성에 대한 차별을 더 늘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수지는 생물학적으로도, 정체성으로도 여성인데 여성이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말하면서 왜 페미니즘이 아니고 휴머니즘이라고 변명해야 하나.

지난 2015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운동이 있었다. 페미니즘이 무슨 범죄처럼 인식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서두를 꺼낸 뒤에야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때의 운동이었다. 지난 3~4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늘 나아지고 있다고들 말하지만 아직도 페미니즘이란 말은 나치나 친일과 같은 극단적인 단어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특히 여자 연예인이 사용할 때는 더더욱.

 손나은이 sns에 올려 페미니즘 논란이 된 사진

손나은이 sns에 올려 페미니즘 논란이 된 사진 ⓒ 손나은


여자 연예인의 페미니즘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설현과 아이린은 소설 < 82년생 김지영 >을 읽는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손나은은 'Girls can do anything'이 적힌 핸드폰 케이스를 들고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논란이 됐고 결국 그 사진을 삭제했다.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인종차별 발언을 하거나, 전범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을 읽고 물건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런 '논란'이 있을 때마다 몹시 혼란스럽다. 개인적인 독서활동에, 위기에 처한 피해자를 도와주려고 한 동의 클릭 한번에 '논란'이라는 딱지가 붙고, 그것이 하루 종일 기사로 쏟아져 나온다. 마치 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페미니즘이 큰 범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범죄를 저지른 남자 연예인들은 어떤가. 대마초, 마약, 도박, 성범죄, 폭행을 저질러도 얼마간만 자숙하면 자신의 범죄를 개그로 포장해서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한다. 여자 연예인은 여성 인권에 관심만 가져도 논란이 되지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남자 연예인은 활동에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글을 써도, '여자들은 멍청해서 남자들한테 안 돼'라며 낄낄거려도,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고 랩을 해도, '미투가 무서워서 팬과 떨어져서 사진을 찍었다'고 미투 운동을 조롱해도 잠깐 시끄러울 뿐 활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여자 연예인은 다르다. 갖춰야 할 미덕이 많다. 예뻐야 하고, 날씬하면서 잘 먹어야 하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안 되고 방긋방긋 웃어야 하며, 예능에 나가서 애교도 보여줘야 하고, 너무 나서서도 안 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안 된다. 직캠이라는 이름으로 무대 밑에서 다리, 엉덩이 위주로 영상을 찍는 것도 참아야 하며, '담배를 피지 않느냐'는 농담을 웃음으로 넘겨야 하고, 20대 후반만 되어도 이모라든가 아줌마라는 소리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미덕이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 페미니즘의 'ㅍ'자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봐도 못 본 척해야 하며, 관심이 있어도 '좋아요'를 눌러선 안 된다. 안 그러면 당장 악플이 달리고, 사진이 불태워지며, '논란'이라는 말이 붙어서 수십개의 기사가 뜨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백상' 설현, 강렬한 블랙 자태 배우 겸 가수 설현이 3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4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겸 가수 설현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 이정민


이 모든 것을 모를 리 없는 여자 연예인 경력 9년차인 수지가 용기를 내어서 피해자를 돕기 위해 국민 청원에 동의를 눌렀고 이를 SNS에 올렸다. 남자 연예인이 했더라면 바로 개념남 또는 개념돌로 등극했을 이 별것 아닌 하나의 SNS 글이 수지에게는 얼마나 고민스러운 일이었을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 끝에 올린 것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수지는 나의 걱정과 응원이 아니어도 많은 이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 잘 지낼 것이다. 이번 논란으로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여자 연예인이 가장 낮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적, 경제적 위치는 그렇지 않지만 TV나 매체 속의 여자 연예인은 어리고 예쁘고 성적으로 대상화되어 있기에 만만하게 느껴지는 대상이다. 누구나 마음대로 예뻐하고, 재단하고, 욕하고,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들에겐 페미니즘이 논란이 된다.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한 송이의 꽃이기에.

그런데 꽃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권에 대해 소리 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수지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이유이다. 낮은 곳에 있는 가장 화려한 꽃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지와 같은 여자 연예인이 많아질수록 '페미니즘 논란'이라는 앞뒤 안 맞는 말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수많은 고민과 두려움, 망설임 끝에 자신의 선의를 행동으로 옮겼을 수지를 응원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고, 우리는 서로의 용기이기에.

수지 페미니즘 설현 아이린 82년생 김지영
댓글1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