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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과 민중 항쟁

38년 전, 광주 시내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동료와 가족, 연인을 위해 누군가는 총을 들었다. 끔찍한 역사적 단면으로만 존재할 뻔했던 80년의 광주는 불의에 항거했던 이들로 인해 위대한 역사로 남았다.

80년 광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역사'라고 불렸다. '광주 폭동' 혹은 '광주 사태'로 불렸던 일들이 기억 투쟁 끝에 공식적인 기억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80년 광주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며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편입될 때, 우리는 소기의 성과를 맛보았다. 저항권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그때의 정권이 불의하였던 것이 인정되는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80년 광주 민중 항쟁'으로 광주를 명명하기를 희망했던 이들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청년정치공동체 <너머>에서는 평화캠프가 주관한 <청년, 광주를 가다! - 2018 광주 역사기행>에 단체 참가로 신청하여 5월 19일과 20일 광주를 방문했다. 이번 기행은 광주 묘역에서 시작하여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광주 묘역 앞에 모인 참가자들의 모습
 광주 묘역 앞에 모인 참가자들의 모습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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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와 함께 옥고를 치른 사람의 아내입니다"

첫날 일정은 묘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참여자들은 조를 나누어 묘역에 안장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김의기 열사의 묘에 섰을 때, 참가자들은 김의기 열사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뿌렸던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유인물의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성이 옆에서 설명을 함께 듣고 있었다.

묵념을 하고 돌아갈 때, 그 여성이 참가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김의기 열사의 묘에서 설명을 듣는 그룹이 별로 없는데 어떤 이유로 묘역 앞에 오래 서 있었는지 그는 물었다. 그리고는 자료집 한 권을 받을 수 있는지도 물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그분은 자신이 김의기 열사와 함께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유인물을 함께 뿌리다 구속된 이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참가자들과 그는 김의기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헤어졌다.

광주의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다 죽어갔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도 광주 5월의 학살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단식을 하다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녁에 만났던, 광주 민중 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아직까지 누군가에게는 80년 광주가 상처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직도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모른다고, 아직도 진상규명은 정확하게 이루어진 적 없었다고.

묘역 앞에서 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묘역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묘역 앞에서 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묘역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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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일 수 없었던 역사

광주의 항쟁은 '광주 정신'이라는 표어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었다. '광주 정신'의 표어는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해방 광주의 이야기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공동체가 사라진 시대 속에서 해방 광주의 시기는 우리에게 위대한 기억으로 남았다. 광장에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과, 부분으로 광장에 나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던 시기가 해방광주의 시기로 기억되었다. 광장에서의 평등 이외에, 삶의 전 영역에서의 평등과 인간으로서의 서로를 기억할 수 있었던 순간이 해방광주 시기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얼굴을 나타낼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38년 만에 수면으로 떠올랐다. '광주 미투'로 불리는 5.18 당시의 성폭력 사건들에 대한 폭로들이 연일 기사 1면을 차지했다. 광주 정신이 추앙받는 이 시대에서도 어떠한 누구는 자신의 경험을 80년 광주 시기의 경험으로 말하지 못했고, 38년 동안의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광주 정신이 다만 불의에 항거한 투쟁만이 아닌 삶의 전 영역에서의 평등과 결사를 만드는 것일 때, 이번 폭로는 우리에게 중요한 말들로 남아야할 것이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광장 속에서만 부르짖어지는 비일상적 영역에 국한될 때 우리의 일상과 민주주의는 불행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정권 교체를 통한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하지만, 그 공간 속에서 여성의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등장하고 있다. 80년 광주가 38년이나 지난 지금에서도 우리는 온전히 '광주 정신'을 이룩한 적이 없음이 이번 폭로로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의 항쟁은 아직까지 온전히 완성된 바가 없다.

전남대 내부에서 참여자들이 광주 항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전남대 내부에서 참여자들이 광주 항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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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항쟁에서 지금의 현실을 보다

광주 기행의 마지막 순서는 목포 신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세월호가 직립이 되었고, 가까이에서 세월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시민들에게 주어졌다. 가까이에서 본 세월호는 생각보다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훼손된 세월호 주변에는 그 잔해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80년의 광주의 투쟁이 국가 기억 속에 편입되는 과정은 곧 지금의 국가를 정상 국가화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80년 광주가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말은 곧 지금의 민주화를 위해 광주의 시민들이 맞서 싸웠던 것이라는 말과 이어졌다. 과연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는가. 16년과 17년의 광장에 섰던 사람들의 힘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 우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광장의 기쁨은 곧 일상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의 삶 속 각계 영역으로 사고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무력한 일상 속에서 버티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목포 신항에 서 있는 낡은 세월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광주 기행의 마지막 순서였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남겼다. '광주 정신'이 현실에 아직 유효할 때, 사람들은 아직 미완의 과제를 품에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전한 삶 속에서의 평등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불의한 탄압에 맞서 일상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80년 광주의 항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사회 속의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정신이 다만 80년 광주의 것만은 아닐 때, 우리는 기꺼이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의무를 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훼손되고 있는 세월호일 수도, 폭로되고 있는 성폭력일 수도, 나의 노동의 가치를 빼앗아가고 있는 사회일 수도 있다. 광주의 미완의 과제를 이제는 이루어야 한다.

목포 신항의 세월호의 모습
 목포 신항의 세월호의 모습
ⓒ 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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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주, #민중 항쟁, #세월호, #목포 신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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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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