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공연된 연극 <트레인 스포팅>이 얼마 전 막을 내렸다. 

<트레인 스포팅>은 처음 소설로 발간되고 영화화되면서, 단 한 번도 문제작이 아닌 적이 없었다. 애초에 마약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다. 마약 중독자들의 갱생기나, 그들을 악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트레인 스포팅>은 정말 정직하게 헤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을, 영화를, 연극을 보고 난 이들의 반응은 머릿속에 남는 것이 마약뿐이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 서사는 우리의 전통적 이분법을 뒤흔들고 있다. 이 뒤흔듦의 방법도 예사롭지 않다. 보통 이분법을 해체하는 방법은 그 이분법의 선악을, 좋고 나쁨을 전도시키는 방법인데, <트레인 스포팅>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이 서사의 방식은 '그놈이 그놈이다'다. 한마디로, 마약을 하든 안 하든 다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서사에선 '멀쩡한' 인생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뿐인가. 이 공연의 실험성, 혹은 무모함은 서사만큼 비대하다. 런던에서 만나본 이 공연은 극장부터 남달랐다. 사실 무대 자체는 이전에 한국에서도 공연된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 '사이레니아' 등의 연극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허나 남다른 것은 극장의 위치였는데 '이런 곳에 극장이 있단 말이야?' 싶은 길을 가다 보면 지하도가 등장한다. 그 지하도 안에 극장이 위치해 있다. 그래비티 가득한 지하도 내에 위치한 극장은 '내가 마약 중독자들이 주인공인 연극을 보러 왔구나'는 감상이 절로 들 정도로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 조민형


영국 공연의 공연장 정도의 실험성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트레인 스포팅>의 서사가 공연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대하여, 소설 원작과 영화와 함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마크는 과거로부터 단절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서사는 전형적인 형식을 띄지는 않지만, 성장 서사라는 갈래로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서사의 커다란 줄거리는 마크가 에딘버러를, 스코틀랜드를, 집을 떠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사의 완결 부분이 되어서야 마크는 집을 온전히 떠날 수 있었다. 서사 내내, 그는 기성세대를 경멸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모습처럼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쨌든 다뤄지지 않았다. 어쨌든 큰 틀에서 보면 이는 성장 서사, 청춘 서사의 부류에 속하는데 그가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집으로부터의 분리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가 이 전의 수많은 분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서사에서 마크의 집은 스코틀랜드-에딘버러고 이는 낙오자 같은 친구들이 가득한 헤로인의 공간이다. 헤로인의 공간, 그는 헤로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꽤나 많은 시도를 한다. 낙오자가 아니려면 섹스를 해야 한다며 클럽에 가지만, 그가 관계를 맺는 존재는 미성년자 다이애나다. 런던으로 가지만 그 역시 실패한다. 그에게 과거와의 분리 시도는, 허무하게 좌절되고 실패된다.

그 이전까지의 서사가 보여준 것을 토대로 상상하면, 결말 이후의 마크가 성장을 할 것이라는 결말은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성장은 좌절되거나, 과거로 귀환하는 일을 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에딘버러에서 런던으로, 영국 바깥으로 도망쳤듯 더 먼 곳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렇게 멀리멀리 도망쳐서 그는 과거로부터 단절될 수 있을까. 희망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소설에서 언급되는 장소, 그가 떠나는 곳으로 선택한 네덜란드가 인상 깊다. 그곳은 어쨌든 마약 합법화로 유명한 국가가 아닌가.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 조민형


단절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인가?

물론 마크에게는 이전과는 다른 조건이 생겼다. 그는 이제 돈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벡비를 배신했다. 책에서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제 마크는 집에 돌아갈 수 없고, 더군다나 돈이 있기에 사회로 편입될 수도 있다. 그런 결말 이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설령 마크가 영국 땅을 떠나 과거와 단절된다고 해도, 그리하여 성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해피 엔딩'인가 생각했을 때 우리는 섣불리 답하기 힘들다. 우리는 안다, <트레인 스포팅>에서 보여주던 '기성세대'가 어떤 것인지. 기성세대는 달리 말해 사회고, 성장은 곧 사회화다.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사회화되고 성장한다는 것은, 기성세대가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친구들을 배신하고 헤로인 중독자로서 삶을 살아온 영국 땅을 탈출한다.

그가 영국 땅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은 (그 친구들이 마약 중독자에, 폭력배라 할지라도)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그들을 배신했기 때문이었고, 그럴 돈을 얻을 수 있던 것은 역설적으로 마약을 거래하여 얻은 돈이었다.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던 인물이 탈출을 위해 사용한 수단은 마약이다. 이는 그가 과거와 쉽게 단절할 수 없다는 단서로 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주는 단절이, 성장이 좋은 것이 아님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가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그러니까, 그는 헤로인 중독이라는 나쁜 것에서 다른 나쁜 것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 이동의 과정도 나빴다. 좋은 결과가 등장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못한 상황이다.

마크의 '성장' (혹은 사회화) 계기는 어떤 정서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성장'은 오로지 돈으로 이뤄졌다. 헤로인 중독의 집을 벗어날 수 있던, 정상적 범주의 사회로 편입될 수 있던 방법이 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진정한 성장이 가능한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만이 이뤄지는 사회는 온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나아지지 않음

마크의 마지막 독백을 눈여겨본다. '당신들'처럼 선택을 하겠다는 마크. 그는 자기 자신과 '당신들'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당신들'에는 사회 안쪽에 속한, 내부인들이 조응될 것이다. '사회 질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의 선언은 공포스럽기도 하다. 주체는 타자가 있어야 존재했고, 주체는 타자를 자신과 분리하지만, 역설적으로 타자가 있어야 그 주체성을 정의할 수 있었다. 이제 그 경계는 허물어지고 질서 바깥의 것들은 질서 안으로 유입되어,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게 섞여 살아갈 것이다. 만약 그리하여 경계가 완전히 파괴된다면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경계는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주체와 타자는 존재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의 권력과 잘못된 것들의 선택이 넘쳐나는 세계.

그가 나열하는 선택들은 죄다 그럴싸한 선택이 아니다. 사실 역설적으로 이는 우리의 인생을 '돌려까'고 있다. 인생을 선택하라, 직장, 건강, 가족, 행복, 주택 담보 대출, 게임 쇼, 교육, 아파트, 보험, 저축, 펀드, 노후 계획,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TV 등으로 대변되는 인생. 인생이란 것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들은 사실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다. 건강, 가족, 행복 정도를 뺀다면 사실 객관적으로 '좋을' 만한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로 가득하다. 소설에서는 이에 대해 더 '사소한', 하다못해 좋지 못한 옵션들을 나열했다. 소설에서는 이에 관해 '자동차를 선택하라, 소파에 앉아 정신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TV쇼를 보면서 인스턴트 식품을 입안에 밀어 넣는 인생을 선택하라. 결국에는 늙고 병들게 되는 것을 선택하라'고 서술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선택할 인생은 오로지 그뿐이다. 그럴싸한 옵션들이 아니다.

문제는 이 선택지마저, '인생다운' 선택지마저 누군가에겐 주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주어지지 못하기에 인생을 선택하지 않기를 택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생을 택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듯하지만, 돈이 주어진다면 - 그리하여 인생을 택할 기회가 생긴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장은 돈을 매개로 아주 쉽게 이뤄진다. 이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좌절스럽다.

진정한 성장이 존재할 수 없는 가망 없는 세대, 그리고 선택

<트레인 스포팅>은 마약을 하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다룸으로써 '마약=무질서=악'이라는 이분법을 깼다. 하지만 <트레인 스포팅>이 보여주려는 것은 그들이 선이라는 게 아니다. 기성세대가 무조건 악이라는 것도 아니다. <트레인 스포팅>은 이 세계의 종말을 보여준다. 소위 아이나 젊은이는 미래로 표상된다. <트레인 스포팅>의 서사 속 어린아이 돈은 죽었고, 토미도 죽었으며,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미래'로 대변되기에는 암울한 존재들이다. 그 암울한 존재들은 낙오되거나, 아무렇지 않게 사회로 편입된다. 사회로 편입되어 구분되지 않은 채, 기존 질서의 사회와 다를 것 없이 다가올 미래를 이끌어 나간다. 그 미래는 희망 없는, 절망적인 존재다. 미래가 없는 시대. 결국 <트레인 스포팅>이 보여주려는 것은 '우리 모두 망했다'라는 것이다.

심지어 영국 런던에서 공연된 버전의 결말은, 마크가 떠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난다. 토미의 죽음 이후 인물들이 역에 모여 '트레인 스포팅'이라는 단어의, 행위의 의미를 되새기며 끝맺는다. 역은 떠남과 모험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는 다가올 성장, 미래 등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에서 떠남이 없다. 기차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만을 할 뿐이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떠나지 못한다. 이는 더 큰 암울함을 불러온다.

그러기에 <트레인 스포팅>은 힘들다. 보통 우리는 서사에서 역경을 극복하면서 희망을 보여주기를 갈망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 너무 가혹하기에 환상을 찾고, 도피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아니면 해결책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를 꿈꾼다. <트레인 스포팅>은 그런 류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현실을 알려준다. 관객들이 설령 인생을 선택한 이들일지라 해도, 우리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고작해야 게임 쇼와 보험과 좋은 차, TV 정도를 고르는 인생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서사가 연극화되어 한국에 올라왔다. <트레인 스포팅>이 영국의 서사라는 점에서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객석을 나서는 관객들은 명확하게 안다.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오히려 혹자는 '차라리 내가 나은 정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는 영화로도 1996년의 작품이다. 그 이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나빠졌을까, 얼마나 더 나쁜 곳으로 추락했을까. '헬조선'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것을 꿈꾸며 '탈조선'을 꿈꾼다. 하지만 저 멀리, 스코트랜드의 젊은이들은 보여준다. 딱히 한국을 탈출한다고 다를 것은 없다고. 이곳 역시 또 하나의 생지옥이라고 말이다.

이렇듯 <트레인 스포팅>은 좌절의 서사다. 하지만 이 좌절은 오히려 객석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선택권을 넘긴다.  객석을 나서자마자 관객들은 미세 먼지 가득한 대기에서 숨을 쉬며 나쁜 세상을 실감한다. '어쨌든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라는 은연 중의 발상을 깨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임을 안다. 이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떻게 살 것이냐고. 인생을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지 않아서, 인생을 선택할 때라면 어떻게 인생을 인생다운 것으로 만들 수 있냐고.

'나아지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오히려 우리의 사고를 막고 문제를 외면하며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일수록 '세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빠지기도 한다'는 인식은 중요할 것이다. 사실 이 좌절적인 세계에선 '그런 생각으로 과연 바뀔 수 있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세계를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과업이 있지 않는가. 도망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이 좌절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긍정의 세계로, 성장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로, 선택의 폭이 넓은 세계로 바꾸기 위한 질문을 끊임 없이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이는, 2018년 한국에 <트레인 스포팅>이라는 연극이 올라온 의의가 될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영국의 <트레인 스포팅> 공연장 사진 ⓒ 조민형



트레인 스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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