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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못
 수성못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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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평야 지대인 전라도 일원이 아닐까 여기지만, 국내에서 호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북이다. 전국 1만7505개 호수의 32%인 5547개가 경북에 있다. 물론 공룡발자국도 현재까지 발견된 전국 약 100여 곳 중 절반이 경북에 있다. 이는 공룡이 많이 살았던 1억4500만∼6500만 년 전 대구와 경북이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던 큰 호수 중 북구의 배자못, 남구의 영선못, 달서구의 감삼못, 서구의 날뫼못, 수성구의 범어못 등이 도시 확장과 현대화의 바람에 밀려 1970∼80년대에 모두 매몰됐다. 달서구의 성당못과 수성구의 수성못만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둘 중 성당못은 전체 면적의 70%가량이 매립된 탓에 사실은 잔해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없어지거나 축소되지 않고 살아남은 수성못

그에 견주면 수성못은 처음보다 커졌고, 지금도 온전한 풍광을 유지한 채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못들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처음보다 커졌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른 못들은 없어졌거나 작아진 데 비해 수성못만은 유일하게 본래의 자연 호수일 때보다 오히려 커졌다는, 그런 의미에 그치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수성못의 확장에는 일본까지 개입되어 있다.

 일본 기후성 천수각 안에 게시되어 있는 오다(왼쪽)와 배신자 아케치의 초상(일부)
 일본 기후성 천수각 안에 게시되어 있는 오다(왼쪽)와 배신자 아케치의 초상(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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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직전의 일본 최고 권력자는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 1534∼1582)였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는 기후성(岐阜城)이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아들 오다 노부타다(직전신충, 1557∼1582)는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명지광수, ?∼1582)의 반란에 밀려 자결로 삶을 마감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배신 세력을 제압하고 대권을 잡는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오다 노부나가의 근거지에서 온 개척 농민

시간이 흘러 1910년,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인 중에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가서 큰 돈을 벌겠다는 야심에 들뜬 사람들이 생겨난다. 기후현의 정장(동장 정도)으로 있던 미즈사키 린타로(수기임태랑)도 그런 꿈을 가지고 1915년 현해탄을 건넌다. 성씨가 '수기'인 것만 봐도 기후 사람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미즈사키 린타로는 이른바 '개척 농민'으로 조선에 왔던 것이다.

 수성못의 못둑 안팎으로 물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 이 사진은 본래 이곳이 물이 모이던 저지대였고, 자연 호수가 있었으며, 못둑이 물 가운데로 설치되었다는, 즉 수기임태랑이 수성못을 처음 조성한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던 자연 호수를 확대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수성못의 못둑 안팎으로 물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 이 사진은 본래 이곳이 물이 모이던 저지대였고, 자연 호수가 있었으며, 못둑이 물 가운데로 설치되었다는, 즉 수기임태랑이 수성못을 처음 조성한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던 자연 호수를 확대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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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수성들판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던 신천이 상수도 수원으로 변경된다. 수성못 아래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몇 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수성못 확대를 도모하는 수리조합을 결성한다.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은 그들은 조그마하던 자연 호수 수성못을 1927년 거의 지금 형태로 확대 개축한다.

일본인이 수성못을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 앞 안내판 등 수성못 일대의 안내판에는 수성못을 미즈사키 린타로가 축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종 때의 <경상도 지리지>에도 수성못으로 추정되는 '문동제'의 존재가 실려 있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수세를 징수하기 위해 기존의 자연 호수 수성못을 키웠을 뿐이다.

 수성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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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9월 3일자 동아일보는 수성못 공사에 총독부 1만1000원, 경북도청 2만 원, 대구부(대구시) 4만 원의 예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6만2500원 차입금이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 관청,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자금을 대어 완공한 수성못 공사를 앞장서서 이끈 사람이 바로 미즈사키 린타로였다. 총독부 등은 무엇 때문에 수성못 확장 공사를 진행했을까? 한국의 백성들을 위해서?

미즈사키 린타로는 그 이후 줄곧 수성못 관리자로 일한다. 1939년 그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을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한다. 후손들은 현재의 자리에 그의 묘소를 만든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침략군의 본부가 주둔했던 대구에 일본인 개척 농민의 묘소가 남아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들'을 지긋이 내려보고 있다.    
     
수성못 옆에 자신의 묘를 쓴 인본인

수성못 확대 축조 공사가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던 1926년 이상화는 못둑에 올라 수성들판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긴다. 시인의 뇌리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어두운 질문이 칼날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로부터 80년 세월이 흐른 2006년, 시인이 무거운 마음으로 섰던 수성못 북쪽 못둑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세워진다. 2017년에는 시비 바로 옆에 시인의 흉상도 건립된다. 흉상은 수성못으로 물을 공급해온 범물동 소재 용학 도서관의 1층 실내에 모셔져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아마 시인도 그렇게 한 일을 두고 '잘했다'고 칭찬하시리라.

 수성못의 상화 시비
 수성못의 상화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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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에 세로로 새겨져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을 읽어본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수기임태랑의 묘소
 수기임태랑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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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