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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8. 11. 판문점, 북한군 포로들이 유엔군에서 지급한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차림으로 돌아가고 있다.
 1953. 8. 11. 판문점, 북한군 포로들이 유엔군에서 지급한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차림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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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회담

한국전쟁 발발 1년이 지나자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그제야 단시일 내 상대방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마침내 양측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회담을 열었다. 양측은 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기자들은 정전회담이 조속히 끝날 줄 알고 3주일 출장으로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양측은 정전회담장에서는 서로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정전협상은 갈수록 난제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랜 시일을 끈 난제는 정전협상 5개 항 가운데 제4의제인 전쟁포로 처리문제였다.

정전회담 제1의제는 의제 선택과 의사일정 문제로 협상 13일 만에 쉽게 타결했다. 제2의제 군사분계선 문제는 4개월간 줄다리기 끝에 쌍방은 지상의 현 전투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이 각 2킬로미터씩 후퇴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제3의제인 정전 감시조항과 실시기구의 구성, 권한 및 직책 문제도 협상 6개월여 만에 타결을 보았다. 제5의제인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안도 협상 21일 만에 타결되었다.

사실 제4의제 포로 송환문제는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가장 쉽게 타결될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끝난 후에 전쟁포로들은 지체 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포로의 자동송환 원칙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유엔군 측은 이 의제에 대해 느닷없이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포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나섰다. 공산 측은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으로 포로들의 전원 송환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이 문제는 정전협상 의제 가운데 최대 암초로 떠올랐다.

1953. 8. 11. 판문점, 북한군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길가에 버린 옷들
 1953. 8. 11. 판문점, 북한군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길가에 버린 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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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21. 정전회담 체결 전 부상 포로 교환 합의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부상 인민군 포로를 판문점으로 송환코자 수송선에서 앰뷸런스로 옮겨 태우고 있다.
 1953. 4. 21. 정전회담 체결 전 부상 포로 교환 합의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부상 인민군 포로를 판문점으로 송환코자 수송선에서 앰뷸런스로 옮겨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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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암초, 포로송환문제

유엔군 측이 자유 송환을 계속 들고 나온 것은 공산군 측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함과 아울러 북한과 중국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김으로써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속내였다.

게다가 유엔군 측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는 13만 명 정도인데 견주어, 공산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는 1만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유엔군 측은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가 적어도 5만~6만 명은 되리라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자유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유엔군은 자존심 경쟁에 따른 잔류 포로의 확보를 위하여 수용소 내에서 대대로 포로 전향공작을 펼쳤다. 유엔군은 포로들에게 민간 정보교육과 공민교육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주입시켰다. 유엔군은 이 교육을 통하여 다수의 친공 포로들을 반공 포로로 전향시켰다.

게다가 반공 포로로 전향한 자에게는 '멸공통일', '반공'과 같은 글자나 태극기를 팔뚝이나 배, 등에 문신으로 새기게 했다. 이는 나중에 반공 포로들이 변심하여 고향에 가려고 해도 문신 때문에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매우 치졸한 조치였다.

그런 가운데 정전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 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였고, 그밖에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 부었다. 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하자, 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서는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팔뚝에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한다고 문신을 새긴 포로들.
 팔뚝에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한다고 문신을 새긴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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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5. 부상병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유엔군 측이 제공한 옷을 벗어 던지고 있다.
 1953. 7. 5. 부상병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유엔군 측이 제공한 옷을 벗어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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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전쟁을 끌 수 없었던 국제정세

미국은 1952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인들은 1951년 1․4 후퇴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이젠하워의 종전 대선공약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하지마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그는 취임 전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1953년 3월에 소련 수상 스탈린이 사망했다.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피폐한 국내 사정은 마냥 한국전쟁을 오랫동안 끌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5월,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의 주장을 반영한 포로교환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 수정안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에 넘겨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정전회담의 최대 난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였다.

1953. 4. 22.  판문점, 유엔군 측 부상 포로가 남으로 송환되고 있다.
 1953. 4. 22. 판문점, 유엔군 측 부상 포로가 남으로 송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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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판문점, 유엔군 측 부상 포로가 돌아온 즉시 앰뷸런스로 옮겨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1953. 4. 판문점, 유엔군 측 부상 포로가 돌아온 즉시 앰뷸런스로 옮겨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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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1953년 4월 6일부터 유엔군 및 공산군 측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정전협정 체결 전이라도 우선 부상병 포로를 송환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4월 20일부터 판문점에서 부상병 포로 송환이 시작되었다.

1953년 6월 18일 밤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국 포로수용소에서 약 2만 7천여 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은 일시에 석방되었다. 이 조치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8년 재임 중 유일하게 자다가 일어난 사건으로 "미국은 우방을 잃은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개탄했다. 처질 영국 수상은 이승만 대통령을 '배반자'로 비난하며 비밀리 미국 정부에 이승만 대통령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 대통령의 이 조치는 막 닻을 내리려던 정전협정회담에 새로운 암초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전협정회담장에 앉은 쌍방은 이미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돌발사태에 유엔군 측은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고 확약함으로써 마지막 암초는 곧 제거 되었다. 

1954. 1. 20. 중국군 포로 가운데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이 자유중국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제스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1954. 1. 20. 중국군 포로 가운데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이 자유중국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제스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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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 1. 20. 공산군 포로들 가운데 남과 북을 마다하고 끝내 중립국으로 가고 있다.
 1954. 1. 20. 공산군 포로들 가운데 남과 북을 마다하고 끝내 중립국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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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8. 6.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 포로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53. 8. 6.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 포로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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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8. 16. 부상 한국군 포로가 귀환 즉시 앰뷸런스로 옮겨지고 있다.
 1953. 8. 16. 부상 한국군 포로가 귀환 즉시 앰뷸런스로 옮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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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 8. 8. 국군 포로를 태운 열차가 임진강 철교를 건너오고 있다.
 1953. 8. 8. 국군 포로를 태운 열차가 임진강 철교를 건너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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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24. 북한군 부상 포로가 송환 협정에 따라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1953. 4. 24. 북한군 부상 포로가 송환 협정에 따라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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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4. 13. 거제도, 포로송환을 위하여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1953. 4. 13. 거제도, 포로송환을 위하여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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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인천, 포로 송환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나는 중국군 반공 포로들
 1953. 인천, 포로 송환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나는 중국군 반공 포로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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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8. 8. 정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 측 포로를 태운 앰뷸런스가 임진강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1953. 8. 8. 정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 측 포로를 태운 앰뷸런스가 임진강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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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2. 16. 판문점, 북한 측 대표가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설득하고 있다.
 1954. 2. 16. 판문점, 북한 측 대표가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설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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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10. 11. 판문점, 한 북한군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북으로 돌아가자 북한 측 인사들이 환영하고 있다.
 1953. 10. 11. 판문점, 한 북한군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북으로 돌아가자 북한 측 인사들이 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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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기에 수록된 사진 이미지들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박도 엮음 <한국전쟁 ‧ Ⅱ>에 수록돼 있습니다.



태그:#한국전쟁, #포로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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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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