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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서른 살 무렵의 일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을 같이했던 그는 명문대 출신의 대기업 사원, 게다가 나이도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소위 '스펙'이 하나같이 화려해 내겐 분에 넘치는 사람 같았다.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너무 지극 정성이고 저돌적인 그가 부담스러워서 몇 번이나 거절했더랬다.

그래도 그는 병풍처럼 나를 조용히 오랫동안 기다려주었다. 그게 미안하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해서 결국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사랑의 단계까지 가는 데에는 실패. 나름 노력을 했는데도 어떤 끌림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끝내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걸까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방송화면 갈무리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방송화면 갈무리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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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그가 다니던 회사의 대표가 나오는 신문기사를 봤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의 소식이 궁금해져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OOO 이사, OOO 회사 사장 취임."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는 큰 회사 계열사의 사장이었고, 꽤 의미 있는 사업을 추진하며 주목받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15년 전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고, 거기에 성공한 중년으로서의 안정감과 여유까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제어를 할 틈도 없이 수천 가지의 생각과 감정이 지뢰처럼 터졌다. 내가 그를 그때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이 가정 하에 '사모님'이 된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보였다. 을 중에서도 슈퍼 을로 살아가는 프리랜서 작가. 생각이 꼬리잡기를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라니.

'돈을 아껴야 하니까 당분간은 카페의 커피는 끊자. 집안 빚 때문에 고생하는 친한 언니, 좋은 곳에 가서 밥 한 끼 사주고 싶은데. 병 때문에 요양 중인 선생님께 용돈이라도 보태드리고 싶은데 그것도 못했네. 혼자 딸을 키우는 싱글맘 친구와 가까운 근교라도 놀러 가고 싶은데 지금은 그것도 낭비다.'

요즘 수입이 시원치 않아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불편함들이 어느새 궁상스러움으로 변주되고 있었다. 왠지 서글퍼졌다. 스스로 내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일터에서 간당간당한 목숨 줄을 지키느라 아등바등해야 하는 처지의 고단함이 밀려왔다. 그런 삶에 치여 지친 탓이리라 애써 변명해봤지만 그래도 속물스러운 생각들이 좀비처럼 들러붙었다.

하지만 떠나간 버스를 보며 공연히 속상해하고 아쉬워해봐야 무엇할까. 세상 쓸데없는 게 그런 미련. 하나 득 될 것 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냉정함을 되찾았다.

나의 선택을 최선으로 만드는 삶

생각해 보면, 내가 만약 '사모님'이 되었다 해도 난 분명히 그의 수입에만 기대어 살진 않았을 것 같다. 내 DNA에는 '내 일'이라는 게 뼛속 깊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내 자리였을 수도 있을 그의 와이프 자리(라 쓰고 '사모님 자리'라 읽는다)가 나의 행복을 보장하는 자리라는 공식은 맞지 않는다.

보통 남의 떡, 남의 자리가 커보일수록 내 선택을 잘못된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남의 자리를 크게 보며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은 지금 현재를 부인하며 무시하는 것. 내 삶은 그렇게 간단하게 부인되거나 무시해도 될 만큼 아무것도 아닐까. 몇 번을 생각해도 결코 아니다.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스틸컷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스틸컷
ⓒ 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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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슈퍼 을로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고 있을지언정, 내 어쩌다 보니 옆구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시린 채로 수많은 계절을 보냈을지언정, 내가 최선을 다해 켜켜이 쌓아온 시간은 지금의 나와 내 삶을 이루었고, 지난한 시간들을 잘 통과한 지금의 내가,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되어도 좋았겠지만 내가 그와 결혼했으리라는 보장도, 결혼했다 해도 행복했으리란 보장도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하며 의심하는 것보다,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 되게끔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그가 자기의 자리에서 일구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참 괜찮은 사람이었던 그를 당시 알아보지 못한 내 썩은 눈은 탓하게 된다. 그리고 큰마음을 주었던 그에게 인색하기만 했던 내 서툴고 미숙했던 마음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리고 예쁜 구석 하나 없던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줬던 그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내게 힘이 되기에 참 감사하다.

내 인생의 가장 흑역사였던 시절을 오히려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사람.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언니, 그래도 좀 아깝다."

내 이야기를 듣던 후배가 아쉬워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다 있는 거야. 가지 않은 길은 꼭 행복하고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꼭 그러리란 보장은 없잖아. 그냥 좋은 추억이면 충분해."

그렇다. 그저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사랑받았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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