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몽골 소년들은 말을 잘 다룬다. 여행자들에게 놀라운 기마술을 보여준 꼬마.
 몽골 소년들은 말을 잘 다룬다. 여행자들에게 놀라운 기마술을 보여준 꼬마.
ⓒ 구창웅 제공

관련사진보기


열 살이나 됐을까? 조그만 꼬마가 말을 다루는 솜씨가 놀라웠다. 초원 위에서 펼쳐지는 '아슬아슬한 서커스'라고 해도 좋을 듯했다. 동행한 몽골 안내원이 "이곳에선 저 정도는 놀라운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애들이 말을 아주 잘 타요"라며 껄껄 웃었다.

몽골의 하늘은 광활한 초원의 색깔을 닮았고, 몽골의 초원은 드넓은 하늘과 유사한 빛깔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초원인지 그 경계가 흐려진다.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청아한 날. 몽골의 풍경은 원시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여행자들의 박수와 환호에 신이 났는지 말 위의 소년은 갈수록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준다. 맞다. 저 아이는 몽골인이다. 혈관 속으로 칭기즈칸과 쿠빌라이칸의 피가 흐르는.

독일에서 온 관광객의 팔에 올라앉아 매섭게 눈을 빛내던 독수리도 소년의 승마를 잠자코 지켜본다. 나 역시 '어린 칭기즈칸'을 만난 기분이었다.

몽골이 아시아에서 시작해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원나라의 기병(騎兵)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큰 덩치를 가진 유럽의 병사들이 긴 창을 휘둘러 몽골의 기병들을 제압하려 애썼지만, 말의 등과 배, 양 옆구리에 자유자재로 매달려 화살을 쏘아대는 신묘한(?) 기마술을 당할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 말에 오른 저 꼬마의 실력을 보니 당시 몽골 기병들의 말 다루는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다. 거대한 제국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은 유언까지 호방담대(豪放膽大)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황제는 "나는 천 년 후에도 분명 기억될 것이다. 왕들 위에 군림한 진짜 왕으로"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푸른 보석 같은 하늘 아래 몽골식 이동 천막 게르가 보인다.
 푸른 보석 같은 하늘 아래 몽골식 이동 천막 게르가 보인다.
ⓒ 구창웅 제공

관련사진보기


몽골 초원의 풍광.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기에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몽골 초원의 풍광.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기에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 구창웅 제공

관련사진보기


초원으로 쏟아지는 빛과 만나는 여행

몽골을 떠올릴 때면 칭기즈칸, 기병과 함께 광활한 초원으로 쏟아지던 빛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어느 세상 봄볕이 그처럼 환하고 따스할 수 있을까. 상상을 뛰어넘는 추위로 인해 겨울엔 몽골을 찾는 관광객이 드물다. 하지만, 반짝하는 짧은 봄과 여름엔 여행자들로 넘쳐난다.

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울란바토르. 한국인과 너무나 닮은 몽골인의 모습에 놀랐다.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한국인이고, 몽골인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날 마주한 초원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깨끗하고 소박한 풍광. 가슴 속 지저분한 욕망이 조용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희망과 꿈의 은유인 '봄'을 노래한 이성부(1942~2012)의 시가 귓전을 울렸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유유자적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에게 '다급한 사연'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저 '지금 이곳'을 즐기면 될 뿐. 하지만, 이성부의 시는 그런 여행자까지도 '두 팔을 벌려' 무언가를 기다리게 하는 드문 체험을 제공한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몽골의 초원 풍경은 어떤 간절한 기다림이 마침내 해소된 듯한 느낌을 준다. 사실 인간이란 매일 무언가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사냥에도 사용된다는 몽골의 독수리.
 사냥에도 사용된다는 몽골의 독수리.
ⓒ 구창웅 제공

관련사진보기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를 떠오르게 하는 몽골의 야트막한 산과 들.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를 떠오르게 하는 몽골의 야트막한 산과 들.
ⓒ 구창웅 제공

관련사진보기


'칭기즈칸 보드카'에 취한 흥겨운 밤

몽골로 떠난 여행은 벌써 몇 해 전, 여러 명의 시인과 소설가, 출판사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한 차례의 세미나와 몽골 문인들과 함께 진행한 공식행사 몇 건이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동행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울란바토르 시내를 배회하거나, 차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 초원을 서성이며 보냈다.

호기심 많은 이들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몽골 역사에 관한 책을 읽거나, 자연사박물관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에서 학구열을 보여주는 이들은 적었다. 대부분은 양고기를 안주 삼아 보드카를 마시는 것으로 여유 시간을 즐겼다.

몽골 사람들의 술 실력은 러시아인 못지않았다. 아마도 겨울이 길고 추운 탓일 것이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 일행을 안내한 몽골의 문인들은 식사 때마다 보드카를 가져와 거푸 권했다. 보드카 병에는 칭기즈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냉혹하면서도 엄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보드카는 알코올 함량이 40%를 넘는 독주다. 향과 색이 없기에 과일주스나 탄산음료를 섞어 칵테일로 마시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몽골인들은 그걸 생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보는 사람이 기가 질릴 정도.

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우리 역시 몽골에서 생산된 칭기즈칸 보드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러시아 보드카 '벨루가'가 부럽지 않았다.

티끌 한 점 없는 몽골의 밤하늘에선 커다란 별들이 휘황하게 반짝였고, 이동식 천막인 게르에선 전통방식으로 요리하는 양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거기에 보드카가 선물한 취흥까지 도도했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흥겨웠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태그:#몽골, #울란바토르, #보드카, #칭기즈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