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 백두대간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래서 현재 생존해있는 70세가 넘은 거장들의 첫 영화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던 미대생이었다. 학교에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영화학교(AFI) 장학금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게 된다. 1971년부터 제작에 들어간 영화는 제작비 문제로 1977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지만 <이레이저 헤드>는 정상적인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심야 영화로 4년간 상영이 되면서 천천히 '컬트 영화'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레이저 헤드>는 언제 보아도 당혹스러운 영화다. 90분의 러닝타임 동안 쉬지 않고 관객의 눈과 귀를 괴롭히는 영화를 보고나서 누군가는 영화라는 매체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인쇄공으로 일하는 헨리는 여자 친구 메리가 자신의 아이를 조산한 것을 알게 되고, 메리와 아기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아이의 모습이 이상하다. 몸통은 붕대로 감싸져 있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파충류의 얼굴에 가깝다. 아이는 아침저녁으로 쉴 새 없이 울고 육아에 지친 메리는 아기를 두고 혼자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옆집 여자에 대한 자신의 욕정을 아기가 비웃자 헨리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아기를 죽여 버린다.

꿈인지 현실인지 상상인지 정의를 내릴 수도 구분할 수도 없는 장면들이 서사의 줄기에서 여러 가지로 뻗어 있는데 이는 헨리가 만나는 사람들(현실과 꿈을 모두 포함해서)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점점 더 불편해진다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 백두대간


우주 공간, 행성 앞으로 곱슬머리 헨리(잭 낸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데이비드 린치는 <이레이저 헤드>는 그의 가장 영적인 영화 중 하나라고 했는데 첫 번째 시퀀스를 통해 이 영화가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경직된 헨리의 얼굴이 지나가고 카메라는 행성의 표면을 지나 부서진 박스의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는 몸의 절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상체를 탈의한 남자의 몸에는 두드러기가 나 있고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레버를 당기면 헨리의 입에서 빠져나온 남성의 정자처럼 보이는 괴상한 생명체가 웅덩이에 버려진다.

시종일관 무언가에 억눌린 듯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헨리는 메리의 저녁 초대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메리의 엄마와 아빠를 만나게 되는데, 긴장한 메리는 간질 증세를 보이고 메리의 엄마는 메리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동시에 헨리를 유혹하며 메리의 아빠는 횡설수설 나사가 빠진 인형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헨리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저녁 식사로 나온 닭에서는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온다. 이 기괴하고 어색한 저녁 식사 장면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데 관객의 불편함은 시간이 갈수록 증폭된다.

헨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폐허가 된 공업도시의 삭막하고 차가운 곳이다. 공장에서 나는 잡음과 비어있는 공간에서 나는 울리는 공간음은 영화 전반에 깔려 불안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갑작스러운 동거가 시작되고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한다. 그로 인해 메리의 신경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헨리는 밝게 빛이 나는 라디에이터 속으로 상상 도피를 하는데 헨리가 도피처로 택한 상상의 세계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라디에이터 안에는 양 볼이 크게 부풀어 오른 여자가 살고 있다. 여자는 무대에 서서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괴생명체(첫 장면에서 헨리의 입에서 나온 생명체와 같은 모습)를 발로 짓이기고 헨리의 상상이 계속되면서 여자의 공연이 이어진다. 원래 대본에는 라디에이터 안에 사는 여자에 대한 분량이 없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영화와 상관없이 양 볼이 부풀어 오른 여자의 모습을 스케치 했고 촬영을 진행하던 중에 그녀를 영화에 등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젊은 남성이 불안과 공포를 체험하는 영화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 백두대간


꿈속에서 헨리는 라디에이터 안에 사는 여자를 만나지만 여자는 사라지고, 영화 첫 장면에서 레버를 당기던 남자를 만난다. 겁에 질린 헨리는 뒷걸음질 치고, 갑작스럽게 그의 몸에서 뽑혀 나온 머리는 지우개의 재료로 사용된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레이저 헤드가 된 것이다.

아기의 심장에 가위를 꽂은 헨리는 하나의 행성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레버를 당기던 남자가 힘겹게 또 다른 레버를 당기는 혹은 밀어내는 모습을 본다. 레버를 당기는 남자의 내장이 텅 비어있는 듯한 상체를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가 레버를 당기자 헨리의 자식이 태어나고 그가 또 레버를 당기자 헨리의 자식이 죽는 등 분명 그를 신화적이거나 신적인,(적어도 헨리의 머릿속에서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이 죽고 헨리는 라디에이터 안에 사는 여자와 행복한 포옹을 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레이저 헤드>는 헨리라는 인물을 통해 젊은 남성이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눈과 귀로 체험하는 영화다. 때로 수수께끼같은 상징들은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과정 자체로 심상을 전달하는 예술가는 흔치 않다. 데이비드 린치는 욕망의 이면을 탐구하는 예술가다. 무언가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유쾌하기보다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이기도 하다.

제작비 부족으로 완성하는데 5년이 걸렸고, 처음 20분 분량이었던 영화는 90분이 되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이레이저 헤드>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이 시간이 행복했다고 말했는데 감독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그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영화 <이레이저 헤드>의 한 장면. ⓒ 백두대간


지그재그, 타일 모양의 바닥, 커텐, 라디에이터등 세트 미술. 공업적인 사운드와 불안을 극대화하는 공간음, 그와 대조적인 아름다운 음악과 공연 장면이 그의 이후 영화들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보면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데이비드 린치는 이미 40년 전에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디언'지는 데이비드 린치를 가리켜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감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니크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난해해서 싫다는 관객도 있지만 그의 두 번째 영화 '엘리펀트 맨'이나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보면 그가 감동적인 드라마도 잘 찍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6년 <인랜드 엠파이어> 이후로 12년이 지났다. 당분간은 그가 장편 영화를 찍을 계획이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2017년, 25년 만에 제작된 TV시리즈 <트윈 픽스>, 시즌3는 <트윈 픽스> 팬들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작품이었다. 그의 팬들은 <트윈 픽스>를 통해 그의 건재함을 확인 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이야기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괴한 그의 상상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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