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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해체해 보고,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여전히 실재하는 남성 중심적인 무의식 구조를 살펴보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 피에르 부르디외 


나는 '여성의 날'이 없어지고 '인간의 날'이 선포되는 날을 꿈꾼다. 호주제가 폐지된 것처럼 페미니즘이나 섹시즘이라는 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날도 꿈꾼다. 모든 운동이 지향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을 향해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페미니즘 역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과의 조화로운 상생을 향해 가는 디딤돌이 하나 더 놓이는 과정이다.

여성의 날이 없어지고 인간의 축제에서 생명의 축제로 나아가는 그날이 온다면 페미니즘이나 섹시즘이라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겨지게 될 것이다. 여성이 자기 몸과 성의 주체가 되고 평등한 인간으로 서기 위한 과정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종교와 교육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에서 드러난 성폭력 문제와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범죄는 심각하다.

미투를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이 뭔가 잘못했을 것이라는 편견을 드러낸다. 심지어 별일도 아닌 것으로 한 사람을 매장시키려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남성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기득권을 빼앗는 일이라고 여기는 시각 탓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누구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기득권을 빼앗으려 한 적이 없다. 가부장적 사회구조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랫동안 힘겹게 살아오던 여성들이 양성평등이라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가자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다름이 차별로 굳어진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평화로운 상생의 삶을 시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페미니즘과 섹시즘 여성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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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섹시즘>(Le Monde)은 존재로서의 여성이 성적 대상에서 평등한 인간으로 삶을 지향하며 투쟁해 오고 있는 24명의 글 24편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탄생해 남성 중심으로 굳어진 사회에서 살아가기 혹은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차이를 차별화 하는 세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당연시 하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여성인권과 시민권 선언>을 쓴 올랭프 드 구주의 이름은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여성은 단두대에 설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설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올랭프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녀는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됐다.

변호사 지젤 알리미는 '여성주의가 진보를 발전시킨다'라는 글에서 프랑스 혁명에서 큰 몫을 감당했던 여성들에 대해 보통 선거권에서 여성을 제외시켰던 부끄러운 프랑스의 역사를 언급한다.

프랑스는 1944년 4월 21일, 민족해방위원회 명령에 따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조건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제 17조)" 여성을 왜곡하고 멸시하는 논쟁 끝에,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보다 한참 뒤늦게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점이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프랑스는 1848년부터 '보통'선거를 도입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보통선거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남성들뿐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여성들은 제외됐던 것이다. - 81쪽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는 것이나 강간이 중범죄로 처벌되지 않던 문화는 약탈혼과 여성을 재산의 일부로 취급하거나 도구화한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이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오랫동안 길들여진 자의와 타의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폭행이나 강제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위계나 힘에 의한 성폭력이 합의에 의한 관계로 둔갑되어 피해자의 고통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폭행, 강제 협박에 의한 성폭력은 강간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성폭력과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던 모든 남자들은 알아야만 한다.

형법에 따르면 강간죄는 '폭행, 강제, 협박 또는 기망을 통해 성적인 삽입행위를 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범죄자는 20년 징역형에 처한다. 강간 형벌은 1971년 형법이 채택된 이래 가해자에 대한 가장 무거운 벌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강간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강간 피해자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랫동안 강간의 법적 정의는 '합의 없이 행해지는 여성과의 성교 행위'로 한정돼 있었다.

이른바 '엑상프로방스 사건'은 1980년 제정된 법의 초석이 됐다. 이 사건은 '폭행, 강제, 협박 또는 기망'을 통해 강간을 합의 하의 성관계로 악용하는 사례를 근절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강간을 '구강이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거나 손가락 또는 도구를 삽입하는 모든 행위'로 재정의하면서 강간의 범위를 확대했고, 남성도 강간 피해자로 인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30쪽


종교계에서 저질러진 상습적인 성폭력 사건은 종교의 힘이 부여하는 특별한 권위와 권력으로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거나 입막음 했다. 하지만 이제 종교계의 미투' 운동을 통해 침묵의 카르텔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미완의 투쟁이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선 것이다. '미투'가 견고한 강간 문화를 깨트릴 수 있으려면 피해자나 방조자 모두 침묵의 카르텔을 깨야만 한다.

뻔뻔하게도 어렵게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자 측의 2차 가해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시 침묵의 카르텔로 강간 문화나 성폭력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길에 인간으로 나란히 함께 서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꿈꾼다. 모두가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람들이 사는 그런 세상을.

'가해자 입장에서' 애정 혹은 놀이의 한 영역으로 치부됐던 강간범죄가 공공의 문제로 그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윤택 연출가가 자신의 성추행을 "관행, 관습적으로 생겨난 나쁜 행태"라고 표현했듯이 끔찍한 범죄는 관습이 됐고 일상이 돼가고 있었다. 왕에게 간택된 백성은 그의 영역을 떠나거나 죽지 않고서는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피해 여성들은 이윤택의 '황토방'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 전형적인 권력형 성폭력은 구성원의 침묵과 방조, 권유로 완성됐고 구성원은 공범으로 키워졌으며, 또 다른 '이윤택들'로 '성장'했다. "나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폭로가 '미투'를 완성했다면, 강간문화는 '나도 가해자'이기 때문에 침묵으로 완성된다. - 침묵의 카르텔이 완성한 '강간문화' 222쪽

덧붙이는 글 | 페미니즘과 섹시즘/ 피에르 브르디외 외 지음/ Le Monde/16,000원



페미니즘과 섹시즘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르몽드코리아(2018)


태그:#종교계 성폭력,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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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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