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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수(迂叟, 사마광의 호)는 평소 책을 읽는 데 있어 위로는 성인을 스승으로 삼고 아래로는 여러 어진 이를 벗하여 인과 의의 근원을 살피고 예와 악의 실마리를 탐구한다. (…) 가능한 것도 다 배우지 못하는데 어찌 남에게 배우기를 구하며 어찌 밖에서 배우기를 기대하겠는가?

마음이 권태롭고 몸이 피곤하면 낚싯대를 던져 물고기를 낚거나 옷자락을 걷어쥐고 약초를 캐거나 아니면 도랑을 내어 꽃나무에 물을 주거나 도끼를 잡고 대나무를 쪼개거나 한 대야의 물로 더위를 씻어버리거나 높은 곳에 올라 눈길 가는 대로 경치를 바라보고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며 오직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할 뿐이다. 밝은 달이 때맞춰 떠오르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면 이끄는 것이 없어도 이끌려가고 붙잡는 것이 없어도 멈추게 된다.

귀도, 눈도, 폐도, 장도 모두 거두어 내 소유로 하니 홀로 마음대로 걸어 거칠 것 없이 넓도다. 모르겠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떤 즐거움이 있어 가히 이것과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이를 '홀로 즐기는 곳(獨樂, 독락)'이라 이름한다." - 사마광의 <독락원기>

계정은 ‘ㄱ’자 형으로 동쪽 마루가 계정이고, 북쪽은 창고방 하나와 서쪽방인 양진암과 동쪽방인 인지헌이 있다.
▲ 계정 계정은 ‘ㄱ’자 형으로 동쪽 마루가 계정이고, 북쪽은 창고방 하나와 서쪽방인 양진암과 동쪽방인 인지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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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독락당을 중심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독락당은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사마광(司馬光, 1018~1086)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자치통감>을 엮은 것으로 유명한 사마광은 왕안석의 개혁 정치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홀로 즐기는 집'인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은거했다.

사마광은 독락원에 독서당을 지어 5000권의 책을 두었다. 그는 책을 읽거나 한가로이 거닐며 자연 속에서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찾았다. 어떤 사람이 군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는데 당신은 어찌 혼자서만 즐거움을 누리느냐며 그를 비난하자 어리석은 자신은 군자의 덕에 비교할 수 없으며 혼자서 즐기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남에게까지 즐거움을 미치겠느냐고 공손하게 반문했다.

게다가 그의 즐거움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박루비야(薄陋鄙野)'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버리는 것이어서 남들이 취하지 않으니 나누어 갖자고 권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든지 즐거움을 함께하고자 한다면 곧 두 번 절(再拜, 재배)하고 이 즐거움을 바치겠다며 즐거움을 감히 혼자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사마광은 맹자와 공자, 안회와 같은 성현들이 즐기는 즐거움에는 도저히 우리와 같은 어리석은 자들이 미칠 수 없으니 사람은 제각기 타고난 분수에 맞게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락당 현판은 이산해가 썼고, 옥산정사는 이황이 썼다.
▲ 독락당 독락당 현판은 이산해가 썼고, 옥산정사는 이황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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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별업

사마광의 독락원처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에게 독락당은 결국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며 홀로 즐기는 집이었다. 그런데 이언적은 왜 이곳을 은둔지로 택했을까. 어떤 이유로 이곳에 그만의 공간을 만들었을까. 그의 건축적인 안목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 장대한 집을 짓고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은 충분했을까. 이 모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언적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언적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번(李蕃, 1461~1500)의 아들로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손소(孫昭, 1433~1484)이고, 외삼촌은 대학자 손중돈(孫仲暾, 1464~1529)이다. 외할아버지는 공신으로 정치적 명망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력을 소유했고, 외삼촌은 영남학파를 주도한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이언적은 외할아버지 손소의 터전에서 외삼촌 손중돈의 후광으로 경주 일대의 강력한 사족으로 성장했다.

옥산에 처음 발을 디딘 이는 아버지 이번이었다. 이번은 그가 살던 양동마을과 가깝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수가 수려했던 옥산 땅을 택하고 계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언적이 10세(1500) 때 아버지 이번이 사망했다. 결국 이언적은 어린 시절을 외가인 서백당에서 보냈다. 18세(1508)에 부인 박씨를 맞이하여 20세(1510)에 분가해서 여주이씨의 대종가인 살림집을 지었다. 이언적은 나중에 경상도관찰사 시절에 별당을 마저 짓고 당호를 무첨당이라 했다.

이언적이 젊은 시절 공부했던 절로 지금은 국보 제40호 십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회재는 정혜사를 드나들며 함께했던 정혜사 주지 상재를 위해 방 한 칸을 들여 양진암이라 했다.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언적이 젊은 시절 공부했던 절로 지금은 국보 제40호 십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회재는 정혜사를 드나들며 함께했던 정혜사 주지 상재를 위해 방 한 칸을 들여 양진암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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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언적은 외가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외삼촌 손중돈의 학풍을 이어받았고 이때 형성된 건축적 영향이 이후 독락당을 지으면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백당과 독락당은 건축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다가 24세(1514)에 옥산에 있던 정혜사를 드나들며 글공부에 전념하기 위한 공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듬해(1515)에 아버지가 지은 계정 자리에 '역락재亦樂齊'라는 삼 칸 초가를 지었다. 이때는 집 모양이 'ㄱ'자인 지금과는 달리 'ㅡ'자 형이었다.

이때쯤(24세) 이언적은 문과에 급제를 했고 경주향교의 교관(25세)이 됐다. 그러던 중 27세(1517)에 그 유명한 손숙돈과 조한보의 무극태극설 논쟁에 의견을 펼치면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두 사람을 모두 비판하여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후대 학자들의 극찬을 받게 된다. 훗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며 문묘에 종사된 대학자로서의 면모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언적은 42세 때 사랑채인 독락당을 새로 지어 학문에 정진했다.
▲ 독락당 이언적은 42세 때 사랑채인 독락당을 새로 지어 학문에 정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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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에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정원은 없으며, 굳이 정원 형태를 찾는다면 입구 왼편에 조성된 작은 화오와 나무 몇 그루 심은 앞마당 정도일 것이다.
▲ 독락당에서 본 앞마당 독락당에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정원은 없으며, 굳이 정원 형태를 찾는다면 입구 왼편에 조성된 작은 화오와 나무 몇 그루 심은 앞마당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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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41세(1531)까지 그는 여러 벼슬을 하며 승승장구했고 이상적인 도학 정치를 펼칠 경륜을 쌓았다. 그러나 41세 때에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낙향했지만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옥산동으로 들어가 독락당을 지었고 5년간 은거했다. 본격적으로 옥산 경영에 들어간 것이다.

42세(1532)에 안채를 'ㄷ'자 형으로 새로 짓고 남쪽에 위치한 사랑방을 역락재라 했고 기존의 역락재는 'ㄱ'자 형으로 계정을 중수했다. 이때 사랑채인 독락당을 새로 지어 학문에 정진했다. '역락(亦樂)'과 '독락(獨樂)'이 공존하고, 바깥에서는 '역락'을, 안에서는 '독락'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때가 이언적이 조영했던 옥산별업 제1대 조영 시기였다. 아버지 이번은 옥산을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고, 아들 이언적은 강학과 저술의 공간으로 삼았다.

원래는 계정을 역락재라 했으나 이언적이 42세 때 남쪽에 위치한 사랑방을 역락재라 하고 계정을 중수했다.
▲ 역락재 원래는 계정을 역락재라 했으나 이언적이 42세 때 남쪽에 위치한 사랑방을 역락재라 하고 계정을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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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번은 옥산을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고, 아들 회재는 강학과 저술의 공간으로 삼았다.
▲ 독락당 아버지 이번은 옥산을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고, 아들 회재는 강학과 저술의 공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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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당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청산곡靑山曲'을 지어 노래했다.

"자옥산 깊은 곳에 초가 한 칸 지어두고 / 반 칸은 청풍(淸風)에게 주고 / 반 칸은 명월(明月)에게 주니 / 청산(靑山)은 들일 때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그는 이곳에서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게 된다. 외부의 어떤 시선도, 외부의 어떤 간섭도, 외부와의 어떤 인연도 끊은 채 오로지 자신과 학문에 몰두한다. 그러기를 5년, 자신을 길러낸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다. 번다한 세상을 차단하되 자연과는 함께했다. 자신에게 깊이 침잠하여 세상과 진정하게 소통하는 방식을 배웠으리라. 독락(獨樂), 나의 즐거움이 그리하여 중락(衆樂), 무리의 즐거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럼, 독락당을 세울 당시 여주이씨 가(家)의 재산 규모는 어떠했을까. 정확한 문헌이 없어 전체 재산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아버지 이번과 손자 이준의 재산을 통해 당시의 재정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손소의 사위가 되어 경주 양동에 정착한 아버지 이번은 처가로부터 부인 손씨의 몫으로 노비 18구와 밭 87부 8속과 5두락, 논 2결 84부 8속과 6두락을 받은 것이 확인된다. 손자 이준의 재산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준의 토지는 옥산동을 중심으로 안강현 서부, 양좌동 남쪽의 강동과 강서, 북쪽의 신광과 죽장, 서쪽의 북안곡까지 걸쳐 있었다. 이런 경제적 기반이 옥산에 별업을 경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처음에는  집 모양이‘ㅡ’자 형이었다가 나중에는 ㄱ’자 형으로 계정을 중수했다.
▲ 계정 처음에는 집 모양이‘ㅡ’자 형이었다가 나중에는 ㄱ’자 형으로 계정을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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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오대(四山五臺)

독락당은 한 번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잡은 후 이언적이 본격적으로 옥산별업을 경영했고 그의 아들 이전인과 손자 이준에 걸쳐 주요 배치가 완성됐다.

이언적은 원래 있던 주변 자연에 사산오대(四山五臺)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았다. 사산은 독락당 주위의 네 산으로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을 말한다. 동쪽에 있는 화개산(華蓋山, 563m)은 원래 어래산 혹은 어린산이었고, 서쪽 자옥산(紫玉山, 567m)은 예부터 그대로 자옥산이었고, 남쪽 무학산(舞鶴山, 433m)은 원래 무릉산이었고, 북쪽 도덕산(道德山, 703m)은 원래 득덕산이었다.

오대는 자계천 주변의 바위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세심대, 관어대, 탁영대, 영귀대, 징심대를 말한다.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관어대(觀魚臺),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詠歸臺),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 탁영대(濯纓臺), 탁영대 북쪽 일대를 징심대(澄心臺), 옥산서원 밖 너럭바위를 세심대(洗心臺)라 했다.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관어대(觀魚臺)이고,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詠歸臺)이다.
▲ 관어대와 영귀대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관어대(觀魚臺)이고,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詠歸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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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마음속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심신을 수양한다는 의미이다.
▲ 세심대 말 그대로 마음속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심신을 수양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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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독락당의 주변 자연인 사산오대를 정원으로 삼아 산책하거나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로써 독락당은 자연 그대로가 정원이 된 유례없는 공간이 됐다. 독락당은 아름다운 산수에 알맞은 공간을 찾아 건물을 세우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인공을 가하는 우리 정원의 일반적인 조영과는 달리, 아예 주변의 산과 자연에 이름만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정원으로 삼은 것이다. 그 자연의 핵심 공간에 주거지와 정자를 짓고 공간을 분할하여 인간의 영역을 정했을 뿐이다.

독락당에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닌 인문적 경관으로 정원의 한 구성요소로 탈바꿈했고 이언적은 이곳에 그만의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 장대한 정원을 홀로 즐긴 것이다. 독락당과 계정에는 최소한의 화오(花塢, 꽃밭)만 꾸몄을 뿐이다. 지금도 화오에는 이언적이 심었다는 산수유와 향나무, 주엽나무가 있다.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 탁영대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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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대 북쪽 일대로 세심과 비슷한 의미이다.
▲ 징심대 탁영대 북쪽 일대로 세심과 비슷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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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독락당, #옥산별업, #사산오대, #역락재,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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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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