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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술 지사의 묘소
 김헌술 지사의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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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일이면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대구 신암선열공원에는 모두 52분의 독립지사들이 모셔져 있다. 그 중 김헌술, 김삼도, 김원휘, 안윤재 지사의 묘소를 참배하려 한다.

김헌술(金憲述) 지사는 1924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1988년 타계했다(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생몰연대가 '1924.10.5∼미상'으로 되어 있다).

민족차별에 분개, 독립투쟁을 결의

김헌술 지사 묘소의 표지석
 김헌술 지사 묘소의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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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술 지사는 일본 경도 중학교 재학 중인 1941년 5월 교유(敎諭, 일제 강점기 때 중등학교 교사의 호칭) 김영규(金永圭)와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부터 9월까지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본과 일전을 겨룰 것에 대비해 군사교육에도 정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일제의 조선인 징병 제도에 반대하여, 징병을 당할 경우 연합군에 투항함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주어 패전을 촉진하는 방안도 마련하였다.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에 앞서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학우 또는 동향의 지기들에게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러던 중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어 1942년 10월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6월 경도(京都)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불경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삼도 지사의 묘소
 김삼도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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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술 지사의 묘소 동쪽은 김삼도(金三道) 지사의 묘소이다. 김삼도 지사는 1900년 9월 3일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고 1967년 6월 2일 타계했다. 김삼도 지사는 1919년 당시 대구 계성학교 재학 중 백남채 교사의 권유를 받아 학생 대표로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계성학교 학생 대표로 대구 만세운동에 참여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원휘 지사의 묘소(왼쪽 뒤로 김헌술 지사의 묘소가 보인다. 두 묘소 사이 멀리 높은 곳에 김삼도 지사의 묘소가 있다.)
 김원휘 지사의 묘소(왼쪽 뒤로 김헌술 지사의 묘소가 보인다. 두 묘소 사이 멀리 높은 곳에 김삼도 지사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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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도 지사의 묘소 아래에 김원휘(金原輝) 지사의 묘소가 있다. 김원휘 지사는 김삼도 지사와 마찬가지로 뒷날 목사가 되었다. 김원휘 지사의 활동을 알아보기 위해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살펴본다.

"생몰년도 : 1884.7.7.~1949.5.23. 
출신지 : 경북 의성
운동 계열 : 3.1운동 
훈격(연도) : 애족장(1990)

공적 내용 : 1919년 3월 12일의 비안면 쌍계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3월 3일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안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바로 귀향하여 3월 6일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을 만나 서울·평양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촉구했다.

이튿날에는 안평면 괴산동 교회에서 목사인 박영화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박영신·배중엽·배달근 등과도 만나 의견을 나누었는데, 때마침 대구 학생인 박상동이 3월 8일의 대구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그 소식을 소상하게 전하였다.

이에 그는 이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 독립만세운동 방법을 상의하고, 3월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마을) 뒷산(목단봉)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의성 경찰서는 이날 오후 4시경 순사부장의 지휘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원휘 등의 주도로 경상북도 도내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목단봉 중턱에 <3.1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김원휘 등의 주도로 경상북도 도내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목단봉 중턱에 <3.1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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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휘 지사 묘소의 서쪽에 안윤재(安允在) 지사의 묘소가 있다. 안 지사는 1877년 11월 17일 황해도 송화군 장양면 평촌에서 태어났고 1944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1944년이면 나라를 되찾는 1945년보다 불과 1년 전이니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타계였다. 

안윤재 지사의 묘소. 안 지사 묘소의 봉분 가운데 위로 이혜경 김성국 부부 독립지사의 묘비가 보인다. 부부 묘비 오른쪽 뒤로 김헌술 지사, 더 뒤로 김삼도 지사의 묘비가 보인다. 안 지사 묘소의 오른쪽은 김원휘 지사의 묘소이다.
 안윤재 지사의 묘소. 안 지사 묘소의 봉분 가운데 위로 이혜경 김성국 부부 독립지사의 묘비가 보인다. 부부 묘비 오른쪽 뒤로 김헌술 지사, 더 뒤로 김삼도 지사의 묘비가 보인다. 안 지사 묘소의 오른쪽은 김원휘 지사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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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공훈록은 안 지사의 운동 계열을 '105인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본 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체포, 그 중 105인을 투옥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고, 신민회 회장 윤치호 등이 친일 경향으로 돌아섰으며,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민회 해체를 계기로 국외 항일 운동을 활발해졌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수록되어 있는 안윤재 지사의 '공적 내용'을 읽어본다.

"1907년 4월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을 추진할 때, 신민회는 1910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김도희를 황해도로 내려보내 김구, 안윤재, 이승길 기타 십수 명의 신민회 회원들에게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서간도 이주 계획을 설명하고 그 준비를 위임하였다.

안윤재는 송화군의 이주민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권태선, 감익룡, 이종록, 전용서, 강유 등과 함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이주 계획을 추진하였다. 일제가 '안명근 사건(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 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을 기화로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1년 1월 관계 인사들을 검거한 소위 '양기탁 등 16인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황해도 송화의 임시정부 조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국, 신민회는 공화정 추구

공훈록의 안윤재 지사 관련 부분 중 주요 내용을 차지하는 신민회에 관해 알아본다. 신민회는 1901년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구, 이동녕, 박은식, 이희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등 독립협회 청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 결사단체이다. 입헌군주국을 지향한 독립협회와 달리 신민회는 공화정 체제를 추구했다.

신민회는 회원끼리도 서로 알 수 없게 점조직으로 꾸려졌음에도 1910년에는 주요 애국계몽운동가의 거의 대부분이 가입했고, 군 단위까지 지부를 두었다. 평양 대성학교 등 국내에 많은 학교를 세웠고, 국외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新興)무관학교의 신흥은 '신(新)민회가 나라를 부흥(興)시킨다'는 의미였다.

독립운동가 묘소 참배는 후대인의 책무

신암선열공원의 52분 독립지사 묘소 중 김헌술, 김삼도, 김원휘, 안윤재 항일 운동가의 유택을 참배했다. 네 분 모두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들이다. 필자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이 후대인의 책무라 믿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분들의 공적을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함으로써 선열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한다. (계속)


태그:#신암선열공원, #김원휘, #김삼도, #안윤재, #김헌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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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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