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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에 맞선 박팽년은 끝내 죽임을 당했다. 아들 삼 형제가 처형되고 집안은 멸문지화로 풍비박산이 됐다. 당시 관비가 된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법에 따라 아들이 태어나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 태어나면 관비가 될 운명이었다. 불행히도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마침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몰래 아기를 맞바꿨다. 아이는 외가로 보내져 외할아버지에 의해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키워졌다. 세월이 흘러 성종이 임금이 되자 사육신에 대한 면죄가 이뤄졌다. 노비로 큰 박비는 비로소 사면을 받았다. 박비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했고 후손들은 대를 이어 그곳에 살았다. 뒷날 박비는 박일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기자 말

별당 정원 하엽정  사랑채 마당에서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의 하엽정이다.
▲ 별당 정원 하엽정 사랑채 마당에서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의 하엽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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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쳐 100년 동안 지은 집

삼가헌(三可軒),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헌이라는 당호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세상에 숨은 듯 비켜선 옛집. 다시 밝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묘골(妙谷)의 옛집은 양명하다. 삼가헌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1417~1456)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순천 박씨의 고택이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 참판을 지낸 박성수(朴聖洙, 1735~1810)가 1769년(영조 45)에 묘골과 가까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살면서 자신의 호인 '삼가헌(三可軒)'을 당호로 삼은 집이다.

삼가헌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 참판을 지낸 박성수가 초가를 짓고 살면서 자신의 호인 ‘삼가헌三可軒’을 당호로 삼은 집이다.
▲ 삼가헌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 참판을 지낸 박성수가 초가를 짓고 살면서 자신의 호인 ‘삼가헌三可軒’을 당호로 삼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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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이라는 당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삼가헌기>에 보면 <중용> 9장에서 따온 글귀임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도 가히 고루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도 가히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가히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는 공자의 탄식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유래한 '삼가(三可)'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인 지(知), 인(仁), 용(勇)을 뜻한다. 사랑채 마루 위에는 삼가헌 편액이 걸려 있는데, 당대의 명필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

이 고택은 완공까지 3대에 걸쳐 100년이 걸렸다. 처음 초가집 형태였던 삼가헌이 안채와 사랑채를 갖춘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박성수의 아들인 박광석 때였다. 박광석은 1783년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1809년에 먼저 안채를 짓고 1826년에 사랑채를 지었다. 그러면서 원래 초가였던 사랑채는 부수지 않고 지붕만 기와로 다시 얹었고,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초가로 그대로 두어 아버지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려 애썼다. 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당,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엽정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원래 있던 파산서당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내어 지금의 모습이 됐다.
▲ 하엽정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원래 있던 파산서당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내어 지금의 모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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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잡지에 실린 별당 정원

삼가헌에서 눈여겨볼 곳은 사랑채 담장 너머에 있는 하엽정이라는 별당 정원이다. 이 별당은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1874년(고종 11)에 원래 있던 파산서당(巴山書堂)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내어 지금의 모습이 됐다.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는 연못을 만들었고 연을 심어 가꾸었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을 하엽정(荷葉亭)이라 했다.

사랑채 마당에서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의 하엽정이다. 연못은 동서 14m, 남북 19m에 달하는 장방형에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이다. 하엽정은 연못 위에 작지만 기품 있게 떠 있는 형상이다.

하엽정 연못은 동서 14m, 남북 19m에 달하는 장방형에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이다.
▲ 하엽정 연못은 동서 14m, 남북 19m에 달하는 장방형에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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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가운데 섬에는 배롱나무를 심었고 연못으로는 널다리를 놓아 드나들 수 있다. 누마루는 원래 방의 높이보다 한 자 이상 높다. 연못을 내려다보는 시야를 확보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정원 서쪽으로 야트막한 산 하나만 넘으면 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서쪽의 지세가 약한 것을 보완하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즉, 약한 우백호를 보강한 것이다.

누마루는 높이가 2.1m로 천장이 낮다. 그럼에도 누마루가 연못 쪽으로 빠져나와 있어 연못의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일어서면 서까래에 연못이 가려지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연못을 완상하기에는 맞춤인 공간이다. 누마루에서 보면 뒷산의 계류가 담장 오른쪽에서 흘러들어 연못에 고였다가 맞은편 담장 아래쪽으로 흘러나간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엽정 누마루 누마루가 연못 쪽으로 빠져 나와 있어 연못의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 하엽정 누마루 누마루가 연못 쪽으로 빠져 나와 있어 연못의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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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엽정 하엽정 누마루에선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 하엽정 하엽정 누마루에선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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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주변에는 배롱나무, 자귀나무, 산수유나무, 살구나무, 단풍나무 등이 심겨 있고 갖은 화초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나무 아래를 유심히 보면 간간이 박힌 괴석을 발견할 수 있다. 별당의 후원은 채소를 가꾸는 채원이다.

하엽정은 아무래도 붉은 백일홍이 피고 하얀 연꽃이 피어날 때 제격이다. 그 이름조차 하엽정이 아닌가. 백일홍은 선계에 피는 꽃이고 연꽃 또한 옛 선비들의 풍류를 말한 것이니 어찌 이곳이 묘한 선계가 아닐 수 있을까. 뒷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연못을 에워싼 고목들, 정원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 풍경이 이 별당 정원의 운치를 더한다.

하엽정 채원 하엽정 뒤로는 채소 등을 가꾸는 채원이 있다.
▲ 하엽정 채원 하엽정 뒤로는 채소 등을 가꾸는 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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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따라 천천히 걸어 보자. 연못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연못을 돌며 보는 풍경, 섬에서 보는 연못과 하엽정 풍경, 담장 너머로 보는 풍경, 담장 밖에서 훔쳐보는 풍경, 이 작은 공간에 우주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곳에선 천지인이 하나가 된다.

삼가헌이 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이 흥미롭다. 삼가헌의 별당채 하엽정과 연못이 일본의 어느 잡지에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 조사를 시작하여 1979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04호로 등록되었다는 것이다.

하엽정 배롱나무 하엽정은 붉은 백일홍이 피고 하얀 연꽃이 피어날 때 제격이다.
▲ 하엽정 배롱나무 하엽정은 붉은 백일홍이 피고 하얀 연꽃이 피어날 때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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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의 유래

삼가헌을 이야기하면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취금헌 박팽년을 빠뜨릴 수 없다. 박팽년의 유일한 혈손인 박일산이 살아남으로써 순천 박씨 가문은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삼가헌이 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팽년은 조선 세종과 문종 때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일찍이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 발탁되어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학문과 문장, 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리던 박팽년은 집현전 학자로 이름을 드날렸다. 그는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부탁받았던 고명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엽정 누마루에서 본 연못과 삼가헌 풍경
▲ 하엽정 누마루에서 본 연못과 삼가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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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은 1455년(단종 2)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까지 시도했을 정도로 강직했다. 그 후 10월경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학식과 재주를 높이 산 세조가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웃음만 지었을 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된 수양대군을 단 한 번도 '전하'라 부르지 않았고 자신을 '신(臣)'이라 낮추어 부르지도 않았다.

세조의 회유를 거부한 그는 옥중에서 심한 고문으로 죽고 만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 동생 박대년, 아들 박헌, 박순, 박분 삼 형제가 모두 처형당했고, 어머니, 아내, 제수, 며느리들은 모두 공신들의 노비가 되거나 관비로 끌려갔다.

삼가헌 삼가헌의 유래는 박팽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삼가헌 삼가헌의 유래는 박팽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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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인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당시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친정 가까운 대구에 관비로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마침 그 무렵 박팽년의 여종도 임신 중이었는데 만약 이씨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다고 이씨에게 말했다. 나중에 이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여종은 딸을 낳았고 몰래 아기를 맞바꿨다. 아이는 외가로 보내져 외할아버지에 의해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길러졌다. 세월이 흘러 박비는 장성했고 성종이 임금이 되자 사육신에 대한 면죄가 이뤄졌다. 박비는 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을 만나 자수했고 사면을 받았다. 박비는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으로 고쳤다.

이 이야기는 실학자 이덕무가 자신의 저서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기록한 것이다.

하엽정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 연못을 만들고 연을 심어 가꾸어서 정자의 이름을 하엽정(荷葉亭)이라 했다.
▲ 하엽정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 연못을 만들고 연을 심어 가꾸어서 정자의 이름을 하엽정(荷葉亭)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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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골과 육신사 그리고 태고정
삼가헌에 왔다면 지척에 있는 묘골의 순천 박씨 집성촌에도 가볼 일이다. 박일산이 할아버지 박팽년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 것이 지금의 육신사의 시작이었는데, 박팽년의 현손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밖에 서성이는 꿈을 꾸고 사육신의 나머지 다섯 분도 함께 모시게 됐다고 한다.

육신사 경내에는 박일산이 1479년에 세운 보물 제554호인 태고정(太古亭)이 자리하고 있다. 박일산이 아흔아홉 칸의 종택을 지으면서 세운 별당 건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사당과 태고정 등 일부만 남았다. 태고정에 걸린 태고정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이고, 일시루 현판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한다. 이 건물의 지붕 또한 특이한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 부섭지붕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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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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