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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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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에게 부치는 편지'
유정천리 꽃이 핀다.

1960년대 말, 고향을 떠나오고 이듬해 추석이었던가? 할아버지는 고향의 전답을 팔아 마련한 삼륜차를 타고 고향을 갔는데 나름대로 금의환향으로 착각을 했겠지만, 사정을 아는 고향 어른들은 콧방귀를 뀌었지. 서울 간 아들이 차를 끌고 왔다며 너의 증조할머니는 마당에서 구구거리던 닭 몇 마리를 잡아 술상을 거하게 내놨다.

아버지 친구들이 모여 밤을 새워 노는데 아버지가 무정천리 노래를 부른다. 교자상 모서리가 하얗게 벗겨지도록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며 밤을 새워 노는 것도 처음 보았지만, 아버지는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것도 처음 보고 들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아들 손을 잡고
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유정천리 꽃이 피고 무정천리 꽃이 진다.

이제 막 서울살이 반년째 접어드는 어린놈이 고향이 뭐며 타향이 뭔지 알겠냐만 어린 마음에도 고향은 익숙했고 타향은 낯설었다. 문제는 어린 시절 느꼈던 그 낯섦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낯설다는 거겠지.

'유정천리 꽃이 피고 무정천리 꽃이 진다' 노랫말의 의미를 아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처음 듣는 할아버지의 노래는 평생 나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철이 들면서 할아버지를 조금씩 미워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유정천리는 한이 되다시피 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와 이별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학교공부가 싫어 엉뚱한 공부를 하며 글쓰기를 즐겼는데 유정천리로 시작해서 무정천리로 끝을 맺었다. 꽃이 피는 유정천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요 꽃이지는 무정천 리는 고향을 등진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이었다.

무정천리 꽃이 진다.

헤드폰에서는 Endless Love 노래가 흘러나오고 쿵짝 쿵짝짝 보라매역을 출발한 열차는 고속터미널에서 "치엔팡 따오잔스 고속터미널 짠" 멘트를 남기고 다시 면목동을 향해 달린다. Endless Love, love라는 뜻은 잘 알겠는데 Endless라는 말은 뭔 말인지 모르겠다. 사전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알면 또 뭐하랴 싶어 그냥 만다.

Endless Love, 기차역 플랫폼, 휙휙 지나가는 암흑 속 풍경, 뚝섬역에서 다시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열차, 이어폰 음악에 맞춰 발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는 아가씨 등등...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지금 아버지 곁에 있는 것들이 그렇다.

작년 봄에는
빚쟁이 피해 다니느라
봄이 오고 가는 것도 모르고 놓쳤는데,

올봄은
너도 시집보내고
더불어 피고 지는 목련을 보았구나.

사랑하는 딸아! 네 고향은 어디메냐?

-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태그:#모이, #고향, #향수, #유정천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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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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