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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자존심이란 없었다. 살면서 자라난 알량한 자존심이 내 주변에 벽을 쌓았다. 결국, 내가 쌓은 장막은 갈등과 상처로 되돌아왔다. 한동안 나는 제주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2007년 제주 해안도로 200km를 달린 후 얼마만의 귀환인지… 비행기 밖으로 제주의 산야와 해안선을 밀고 당기는 물보라가 부서졌다 살아났다. 마음까지 상쾌했다. 해질녘 서귀포 해변의 마을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다 결혼 피로연으로 떠들썩한 제주의 소소한 풍경을 만났다.

태풍의 영향으로 맑던 하늘이 금세 흐려지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댔다. 표선생활체육관은 국내외에서 모여든 170여명의 선수들과 운영진으로 북적였다. 서울에서 안면이 있던 태모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체육관 모퉁이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서글서글하게 웃음 띤 태모씨 얼굴에서 묘한 향기가 났다. 나를 제주로 이끈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 다시 불러준 제주가 고마웠다.

 태모, 경수와 제주를 날다~~
 태모, 경수와 제주를 날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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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힘찬 역주 표선 풍력발전단지 광장에서
▲ 선수들의 힘찬 역주 표선 풍력발전단지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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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스 첫째 날(30km), 달리기가 좋다 사람이 좋다

10월 10일 아침 8시, 영실주차장에 모여든 선수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아스팔트 광장을 벗어난 선수들이 앞 다퉈 편백나무 숲으로 뛰어들었다. 상큼한 목향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태모씨도 거친 쇳소리를 내며 내 곁에 바짝 붙어 따랐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상에 찌든 노폐물이 연신 땀으로 배출됐다. 돈내코 이정표 앞 CP(17km)에 도착하자마자 태모씨가 주저앉았다. 허리를 숙인 채 몸을 웅크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속도가 더뎌 제한시간에 걸릴까 불안했다.

망설임 끝에 손목에 두른 버프 한 쪽을 그의 손에 쥐어줬다. "태모씨, 우리 이제부터 함께 뛸까?" 태모씨의 눈빛이 파릇 떨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해발 1700m의 윗세오름 표석을 향해 7.5km를 기어올랐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하늘이 열리고 제주가 본색을 드러냈다. 위로 용암이 흐르다 세로로 굳은 백록담 남벽의 절경과 등 뒤로 서귀포시와 제주의 파란 바다가 온 시선을 압도했다. 격한 박동 속에 살아있는 제주의 숨결이 느껴졌다. 역시 힘겨운 세상살이도 살만한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억새풀 숲을 가르고, 내리막의 윗세오름 계단을 따라 영실주차장을 향해 신명나게 내달렸다. 

 뛰자~ 제주의 자연 속으로
 뛰자~ 제주의 자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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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모야~ 뛰자, 넘자~ 오름 너머로
 태모야~ 뛰자, 넘자~ 오름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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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스 둘째 날(30km), 제주는 사막보다 아름답다

새벽부터 심상치 않던 빗줄기에 거센 바람까지 가세했다. 아침 8시, 레이스는 표선해비치 해수욕장을 출발해 해안선을 따라 이어졌다. 해변은 날선 현무암 바위들이 솟아올라 발을 디딜 때마다 발목이 돌아갔다. 9시 30분, 소방방재청에서 풍랑경보를 발령했다. 어선들의 출항금지와 출항 어선의 신속한 대피 메시지가 핸드폰으로 전해왔다. 불어야 바람이다. 자연을 타듯 비바람이 거셀수록 선수들의 주력도 더욱 빨라졌다. 둘을 연결해 준 버프도 휘청거리는 우리를 탄탄히 지탱해 주었다.

신천 바다목장에 들어서자 성난 파도가 선수들을 집어삼킬 기세로 몰아쳤다. 비바람에 씻겨 문명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고, 초지에서 맞은 제주의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센 비바람 소리마저 오케스트라 선율처럼 웅장하게 들려왔다. 섭지코지로 연결된 해안도로는 억새와 어우러져 가을 운치를 더했다. 방두포 등대를 넘어서자 성산일출봉이 더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새 태모씨와 나는 한 목표를 향해 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난폭한 빗줄기를 가르고 온 몸을 때리는 바닷바람에 기진맥진해도 마주보고 웃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 태모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이제 태모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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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담 남벽을 넘어, 아래로 아래로~
 백록담 남벽을 넘어, 아래로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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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속 레이스의 전리품
 신발 속 레이스의 전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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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스 마지막 날(40km), 태모, 경수와 제주 날다

노면이 밤새 내린 비로 흥건했다. 아침 7시, 환호성과 함께 움츠렸던 선수들이 표선 풍력발전단지 광장을 벗어나 큰사슴이오름(*대록산)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기상악화로 일부 도로가 통제되고 레이스 거리도 35km로 단축됐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따라 대록산 정상까지 단숨에 밟아 올랐다. 말에는 에너지가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내 구령에 태모씨도 목청을 높이며 사력을 쏟았다. 주로는 편백나무 숲과 황금빛 억새 군락이 점령한 따라비오름으로 이어졌다. 바람도 지치지 않고 정말 억세게 불어댔다.

가시천을 따라 행기머체로 이어진 숲길은 마치 부탄의 원시림에 들어선 착각이 들 정도로 험준했다. 급경사의 주로는 날카로운 돌 뿌리들이 튀어 올라 지뢰밭을 통과하듯 위태롭게 피해갔다. 이 상황을 무사히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한계치를 높여야 했다. 노랗던 태모 씨의 얼굴이 표정을 잃어갔다. 좀 더 힘내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 그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일어나 버프를 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주의 오름을 오르는 선수들
 제주의 오름을 오르는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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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야 바람이다~~! 신천 바다목장에서
▲ 불어야 바람이다~~! 신천 바다목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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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파도를 가르며 표선해비치 해수욕장에서
▲ 성난 파도를 가르며 표선해비치 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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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모래폭풍 할라스 보다 더 거친 비바람을 뚫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격한 박동을 참아내며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100km 제주의 산야를 넘고 달렸다. 강철보다 질긴 버프가 서로를 끌어주고 당겨주었기에 완주가 가능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한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손을 맞잡은 태모씨 덕에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힘이 되어준 소중한 벗이 되었다.

유네스코 UNESCO가 인증한 자연과학 분야 3관왕을 모두 거머쥔 제주. 세계의 여느 대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건 제주가 품은 천혜의 자연 보고 때문인가 보다. 비록 2박 3일의 짧은 레이스였지만 태모씨와 나는 제주에서 한 몸이 되었다. 멋진 코스를 설계하고 8년째 이 대회를 이끌어온 안병식군이 대견하다. 당신이 달리고 싶다면, 당신에겐 이미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다시 가고 싶은 제주, 나는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태모, 경수와 드디어 웃다 제주트레일러닝 대회후
▲ 태모, 경수와 드디어 웃다 제주트레일러닝 대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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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선수들의 환호 표선해비치 해수욕장에서
▲ 출전선수들의 환호 표선해비치 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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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0년 넘게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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