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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이라는 단어가 사치스러운 순례길

아침잠이 많은 데이비드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짐을 꾸렸다. 밤새 뒤척거리면서 길 위의 여정에서 혼자 걷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부담을 주거나 받지 않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내게 끊임없이 암시를 했다. 발바닥이 아픈 이상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있었다. 그 짐을 혼자 감당하고 싶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는 마음의 부채가 더 불편했다. 

오른쪽 왼쪽 갈림길
 오른쪽 왼쪽 갈림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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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늦어질 수밖에 없으니 누구보다 더 일찍 출발해야 했다.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앞서가는 순례자가 있었다. 일본인 노부부였다. 그들 발걸음을 따라 나도 아침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소금물에 담근 발은 걷기 시작하자 아픔도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마을을 벗어났을 때 갈림길에 섰다. 잠깐 고민했다.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일본인 노부부가 왼쪽으로 향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왼쪽은 오늘 목적지인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로 가는 대체길이었다.

대체길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순례길 오른쪽에 오래된 2차선 도로가 있었다. 가끔 차가 지나가고 짝 지은 자전거 순례자들이 페달을 밟고 지나갈 뿐,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라 오는 사람도 없었다. 일본인 노부부가 뒤처져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한참 전이었다.

순례길인 오솔길도 흙길이 아니었다. 돌멩이가 섞인 자갈길이었다. 나처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사람은 걸을 때마다 통증이 연달아 왔다.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차가 온다 싶으면 오솔길로 내려서기를 반복했다.

오솔길 왼쪽으로 플라타너스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플라타너스는 조그마한 그늘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들판이었다. 들판을 내리누르는 하늘은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잿빛이었다.

단조로운 풍경과 달리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우리나라 하늘보다 이곳 하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산이 없어 시야를 가리지 않아서일까. 공기가 그만큼 맑다는 것일까. 오른쪽 하늘은 잿빛 구름에 뒤덮여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처럼 보였지만 앞쪽은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얌전히 떠 있었다. 왼쪽도 비가 곧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머리 위 하늘은 쾌청했다.
엘 부르고 라네로스(El Burgo Ranero) 바 메뉴에 있는 신라면과 햇반
 엘 부르고 라네로스(El Burgo Ranero) 바 메뉴에 있는 신라면과 햇반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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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드리운 먹구름
 낮게 드리운 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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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야(Mansilla de las Mulas)를 7km를 남겨두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 잽싸게 배낭 커버를 씌우고 우비를 꺼냈지만 비는 곧 그쳤다. 날씨는 꾸물거렸지만 바람이 불어 걷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끝없는 자갈 오솔길. 내 시야가 닿는, 움직임 없는 정면 하늘. 앞뒤로 보이지 않는 순례자들. 변함없는 풍경을 가로 질러 나 있는 길. 그곳에 나만 홀로 걷고 있었다. 모 시인이 일찍이 젊은 나이에 극복했다는 절대고독은 어떤 걸까. 풍경에 홀로 고립된 이런 기분을 두고 하는 말일까. '절대 고독'이라는 어휘 자체를 꺼낸다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이와 비슷할 거라고 단정했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배낭을 메고 플라타너스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는 나는 젊은 붓다도 젊은 예수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라는 외로움에 지친 절름발이 순례자를 자청하는 한 사람이었다. 이런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붓다나 예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그 용기는 얼마나 대단한가. 그의 자존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이마에서 땀 한방울이 흘러내려 입 속으로 들어왔다. 짭짜래한 그것은 뜨거운 한 점 열이었다. 내 속의 열. 외로움의 열. 고독의 열.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수술 전 자궁의 3분의 1만이라도 남겨달라며 의사를 붙잡고 울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비근한 삶에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첫 시집을 이제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조용히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대 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


위의 발췌문은 일찍이 절대 고독을 극복했다는 모 시인의 첫 창작집 '시인의 말'에서 따온 마지막 문단이다. 나는 그곳에서 특히나 "초대 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라는 구절을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저 표현은 역설이었다. 외로우니 나를 봐달라는 지독한 고집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기형'이라는 어휘로 강조점까지 제대로 찍지 않았는가. 

내 초라한 걸음걸이. 누군가에게 초대받은 적도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과 같은 이곳에서의 순례길. 그것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었다. 편한 길을 놔두고 험한 길로 나선 것은 순전히 내 의지였다. 그런데 나는 그 기형에 애정이 가니, 그것은 또한 어떤 연유일까.

"사람들아, 나 좀 봐주소!"라고 나는 외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또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을 끼고 있는 양쪽 하늘. 그리고 머리 위 쾌청한 하늘. 길게 뻗어 있는 길. 따가운 발바닥. 자갈길이 밑창에서 부서지며 연약한 속살을 건드렸다. 왼쪽 발바닥은 돌멩이 하나 들어간 것처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발을 벗고 털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통증이 일어날 때마다 외로움과 고독이 더욱 생생해졌다. 그럴 때마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절대고독을 견뎠다는 모 시인의 자신감에 하나하나 말뚝을 박았다.

"그래, 당신 잘났구려, 잘났구려, 고작 이 정도에 나는 무너지는데…."  

프레그리노(Pregrino ; 목숨을 걸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덤
 프레그리노(Pregrino ; 목숨을 걸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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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을 땅에 내디딜 때마다 묘한 고통에 복종하지 않기 위해 나는 속도를 줄였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갔다. 드디어 목적지인 마을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게 당장 필요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일 급한 것은 약국을 찾는 거였다. 밴드도 다 떨어져 간다. 발바닥 물집은 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독약도 사야했다.

아, 마을이 보여도 그곳에 닿기까지 몇 킬로미터는 가야한다. 신기루 같다. 걸으면 걸을수록 마을이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것을 그동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같이 있어도 혼자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초입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초입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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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을에 들어서서 알베르게를 고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야외 테이블에서 쉬고 있는 프랑스인 데미안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일찍 도착한 그는 말쑥하게 씻고 있어서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침대를 배정받자마자 양말을 벗었다. 왼쪽 발바닥 물집이 무섭게 터져 있었다. 막상 신발을 벗고 보니 따가워서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데미안이 약국까지 부축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2분이면 걸을 거리를 부축을 받고도 십 분에 넘게 걸렸다. 약국은 씨에스타가 끝난 시간에는 5시부터 8시까지 영업을 한다. 걸음이 늦어서 33.24km를 7시간 14분 동안 걸었다. 오후 3시가 지나서야 도착했다. 나는 5시에 다시 약국을 찾아 갔다.  

약국에서 나와 광장에 앉아 발바닥을 소독하고 햇볕에 말렸다. 데미안에게는 먼저 알베르게로 들어가라고 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광장 중앙에 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세 개의 동상이 있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엎드려 있는 남자가 보였다. 꼭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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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광장에 있는 동상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광장에 있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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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로 돌아간 데미안은 다시 나와 슈퍼에 들렀다가 체리를 사가지고 왔다. 내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그는 데이비드도 같은 숙소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알베르게가 몇 군데 있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그를 만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공립 알베르게도 아니었다. 

11유로를 주고 저녁을 신청했다(침대는 5유로). 데이비드도 신청했는지 야외 테이블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그와 합석했다. 데미안은 따로 저녁을 신청하지 않아서 그들 일행(프랑스인)과 섞여 다른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동안 나는 데이비드와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나는 데이비드에게 아침에 인사도 하지 않고 먼저 나온 것이 미안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었다. 너는 왜 까미노 친구(길 위의 동행)를 만들지 않냐고. 혼자 오는 사람들은 혼자 걷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곧잘 동행자를 만들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스물네 살에 잘 생긴 대학생이었다. 영어도 능숙했다. 그러자 그가 바로 반격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니? 오늘 아침도 나를 기다릴 수도 있으련만 너 혼자 출발했잖아. 혼자 걷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야?"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생각이 많아서 그래. 생각이 많을 때 누군가가 질문을 던지면 귀찮아져."

그 뒤로 많은 말들이 이어지려 했지만 꿀꺽 삼켰다. 발상태가 좋지 않은데 누군가와 동행하면 그 동행자의 걸음을 자꾸 늦추게 만든다고 그래서 미안해서 그런 거라고도. 그리고 또 그 미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 설명해야할까. 나는 차분하게 다시 정리해서 말했다.

"혼자 걸으면 혼자 쉬고 싶을 때 쉬고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서 갈 수 있잖아. 시간이 다소 지체 되더라도 목적지에는 도착하기 마련이야. 그래서 나는 혼자 걷기로 했어."

그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몇 킬로미터까지는 누군가와 같이 가기도 해. 그런데 결국은 또 혼자 가게 되더라고. 하지만 또 누군가를 만나겠지 싶어."

나는 그를 응원했다.

"그래, 다들 자기 걸음으로 완주하기를 원하지만 마음에 맞는 길 동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너도 조만간 만나겠지 싶어."

길 위의 서재
 길 위의 서재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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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저녁은 스파게티에 치킨, 아이스크림과 거친 와인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행인지 데이비드와는 다른 공간을 사용하였다. 나는 발바닥 고통과 함께 밤새 뒤척였다. 새벽이 되자 내 고통을 아는 듯 조용하게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버스를 타기로 결심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과연 내 결심이 잘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프리그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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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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