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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는 '역사를 담은 달력'이 아니라, '달력 형식을 빈 역사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300부가 금세 동이 났다.
▲ 기부로 완성된 2018 현대사 달력 한 아이는 '역사를 담은 달력'이 아니라, '달력 형식을 빈 역사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300부가 금세 동이 났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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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이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수차례 오간 문자와 메일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실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믿기 어렵다며 무질러버리기 일쑤였다. 되레 사기일지도 모르니, 주민번호나 주소 같은 개인 정보를 함부로 건네지 말라는 당부까지 했을 정도다.

실은 나도 그랬다. 차라리 불우이웃돕기라면 모를까, 지금껏 이름은커녕 얼굴 한 번 스친 적 없는 생면부지의 남에게 수백만 원을 선뜻 내놓을 사람은 없을 거라 여겼다. 돈도 돈이지만, 직접 업체에 맡겨 물건을 제작한 뒤 택배로 부쳐야 하는 번거로운 일임에랴.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 때문에 마음 접어야 했던 '현대사 달력'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지난 2월 말 완성된 PDF 파일을 공유한다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는데, 보름쯤 뒤 기사를 봤다는 어떤 분이 취지에 공감한다며 쪽지를 보내왔다. 대신 탁상용 달력을 제작해줄 테니 다짜고짜 파일을 보내라는 것이다(관련기사 :'빼빼로' 빼고 '전두환' 넣은 이 달력, 정체가 뭐냐면).

사실 기사가 나간 뒤, 파일을 받고 싶다는 분들의 쪽지와 메일이 많긴 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교사부터, 중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녀와 함께 현대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젊은 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들의 격려를 받았다. 개중에는 달력의 세부 내용보다도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며, 장문의 편지를 보낸 경우도 있었다.

활용 방법도 다양했다. 컬러프린터로 출력해서 식탁의 유리판 아래 넣어두고 식사 때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분도 있고, 아예 기존의 탁상용 달력 위에 덮어 씌워 붙이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스마트폰 바탕 화면에 깔아두고 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비록 달력으로 제작되진 않았어도, 땀 흘린 만큼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직접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니, 처음엔 '거래'인 줄로 알았다. '뜻 맞는 사람들 몇몇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달력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나름 진심이 담긴 쪽지였지만,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호의는 늘 그렇듯 의심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공유하겠다고 밝힌 만큼 파일과 함께 의례적인 감사의 인사를 짤막하게 적어 보냈다. 

며칠 뒤 달력 사이즈와 재고 수량을 거론하며 곧장 제작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답장이 왔다. 이후 실무적인 메일이 몇 차례 더 오간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제야 비로소 '빈 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의심은 시나브로 고마움과 신뢰로 변해갔다. 그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준 것도 이 즈음이다.

솔직히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작비용을 학교에 기부금 처리를 할 수 있는지를 물어와 움찔했던 적도 있었다. 액수의 과다를 떠나 업체 측에서 세금 공제 혜택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에 찜찜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업체 종사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무슨 일로 기부금 처리를 요구했던 것일까.

듣고 보니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그와 '뜻 맞는 사람들' 중에 한 달력 제작업체의 사장과 일면식이 있는 이가 있었고, 그곳에 취지를 대략 설명하고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런데, 업체의 사장은 대뜸 굳이 몇이서 '십시일반' 할 필요가 없다며 자신이 만들어주겠다고 했단다.

그는 순간 대놓고 생색만 낸 꼴이 돼버렸다며, 업체의 사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했고, 가능하다면 기부금 처리가 될 수 있도록 학교에 요청한 것이다. 현금이 아니라, 일반적인 도서도 아닌 탁상용 달력이 기부되는 경우가 처음이어서, 학교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의 바람대로 제작비용의 일부를 기부금 처리하게 됐다.

급기야 지난 3월 마지막 날, 300개의 달력이 여덟 상자에 나눠 담겨져 학교로 배달되었다. 배달 중에 달력이 손상되지 않도록 겹겹이 포장지로 감쌌는데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여느 탁상용 달력보다 큰 데다 종이의 질도 좋고 배경사진과 글자의 색감도 선명해 눈에 도드라지고 쉽게 읽힌다. 한국사 교사로서, 올해 아이들에게 건넬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달력 상자가 도착하던 날, 겨우내 함께 작업을 한 민수(가명)는 달력 앞에서 울컥해하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연신 완성된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얼른 보여주고 싶다며, 자신의 덩치만 한 상자를 들고 곧장 교실로 향했다.

300개의 달력을 배분하는 일만 남았다. 지난겨울 작업을 시작할 때에는 민수 학년의 모든 아이들에게 각자 한 개씩 건넬 계획이었는데, 막상 고3 생활이 시작되니 달력에 신경 쓸 경황이 없는 듯 보였다. 민수도 고3들에게 일률적으로 건네는 것보다 학년 구분 없이 원하는 친구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각 교무실과 교실의 교탁 위에 한 개씩 비치하고, 한국사 수업 때 모둠활동 자료로 활용할 학급 당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교사들 중에도 원하는 경우가 있지만, 애초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니 만큼 우선순위에선 뒤로 밀렸다. 달력의 첫 장에도 이미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고 밝혀두었다.

아이들은 달력을 예쁘게 잘 만들었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전체적인 디자인도 세련되고, 글의 내용도 그다지 난삽하지 않게 편집되어 쉽게 읽힌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낯설기만 한 현대사를 달력으로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부모님 앞에서 으스댔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학교를 다니며 배운 기억이 전혀 없는 사건들이 많지만, 이를 계기로 책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찾아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래선지 아이들은 역사를 기록한 달력이 아니고, 달력 형식을 빈 역사책이라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더 큰 화제가 된 건, 단연 달력이 기부를 통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회적 명성이 필요한 대기업도 아니고,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수백 만 원을 선뜻 내놓는 건 뉴스에서나 나오는 일로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며 슬쩍 눙치기도 했다.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 주변엔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네요. 기부라면 지금껏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봤는데, 우리 사회의 기부 문화에 대해 성찰해보는 소중한 기회였어요. 하긴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 모두가 사리사욕에 눈 먼 이명박과 박근혜 같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유지가 됐겠나 싶긴 해요."

'요즘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하던 바로 그 아이였다. 그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은 이번 일로 분명 우리 주변에 선한 이웃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선한 이웃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을 게 분명하다. 잊힌 현대사를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달력프로젝트가 가져온 '나비효과'이다.

지난겨울 시작된 '현대사 달력 프로젝트'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를 비롯한 '뜻 맞는 사람들 몇몇 분들'과, 선뜻 '짐을 홀로 떠안은' 달력 제작업체 사장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아울러 기부에 솔선수범하는 민주시민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라 믿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태그:#기부, #현대사,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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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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