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세상을 흔들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피해를 폭로하자, 오랜 기간 지위와 유명세를 이용해 여성들을 억압하던 이들의 추악함도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폭로 그 후. 가해자 몇 명을 축출하면,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일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미투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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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그 후. 가해자 몇 명을 축출하면,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일할 수 있을까? ⓒ Pixabay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불붙은 '미투 운동(#Metoo, 나도 고발한다)'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그 불이 가장 먼저 가닿은 곳은 예술계였다. 원로 연극인, 배우, 감독, 작가, 가수, 미술가, 사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 폭로들은 오랫동안 감춰둘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여전한 상처였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여성들의 분노는 '더 이상 업계 내 성폭력을 방치할 수 없다'는 외침과 같다.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피해자들이 용기 낸 이유 역시 이번에야말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 인식과 성차별 구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이들의 용기에 제대로 응답하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위드유, #미투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

미투에 의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윤택 연출가는 구속됐고, 배우 조민기는 경찰 조사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미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성폭력은 일부 남성들의 일탈이 아니라, 남성 위주의 권력 구조와 성별 권력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투가 지목한 모든 가해자의 처벌이 이뤄진다 해도,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투는 앞으로도 계속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오마이뉴스>는 미투에 제대로 응답하고 연대(#withyou)하기 위해, 여성학자·성폭력 전문 변호사·여성 예술인·업계 여성 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이에 앞서, 현재 대중문화예술계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배우, 감독, 작가, 스태프,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 등 현재 대중문화예술계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100명에게 일대일로 설문 링크를 전달했으며, 그중 39명이 답을 보내왔다.

응답자들의 경력은 1년부터 30년까지 다양했다. 평균 경력은 10.3년. 이들 중 66%(26명)가 성폭력을 직접 경험했고, 46%(18명)가 목격했으며, 79%(31명)가 피해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 오직 2명만이 성폭력 피해를 직접 경험한 적도, 목격한 적도, 피해 사례를 들은 적도 없다고 답했는데, 응답자 대부분이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에 공감한 여성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압도적인 비율이다.

이화여대 성폭력 의혹 교수 연구실 뒤덮은 메모지들 학내 교수 성추행과 관련한 미투(#MeToo) 고발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K교수 연구실 문 앞에 성범죄를 규탄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 이화여대 성폭력 의혹 교수 연구실 뒤덮은 메모지들 여성들은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미투에 제대로 함께(#위드유)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교수를 향한 미투 폭로가 나오자, 해당 교수 연구실에 성범죄를 규탄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붙이며 연대의 뜻을 보였다. ⓒ 유성호


설문 응답자 66% "성폭력 경험했다"

"방송가에는 숨 쉬듯 성폭력이 존재한다." 

<오마이뉴스>와 만난 한 9년 차 작가 A의 말이다. '빨아주는 멘트 써라', '자막이 섹시하지 못하네'와 같은 표현은 너무 일상적이라 새삼스레 문제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이 작가는 회의할 때 '왜 테이블에 가슴을 올려놓느냐'는 말이나, 시사할 때 여성 출연자의 얼굴-몸매에 대한 노골적인 품평, '여성 출연자가 많으면 자기들끼리 기싸움 하느라 잘 된 케이스가 없다'는 성차별적 발언도 그저 '숨 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남성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나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작가는 한 번도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항의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설문 응답자 중 상당수도 "성폭력을 경험/목격하고도 바로 문제제기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유는 주로 "사람들이 나를 탓할까 두려워서", "이후 불이익이 걱정돼서", "당시에는 성폭력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해서"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도움 청할 곳이 없어서",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걱정돼서"라는 답도 있었다.

한 응답자는 "(성폭력 피해를) 문제제기 하면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에 수직관계에 있는 피해 여성이 관리직인 남성의 성범죄를 지적했다가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며 구조적인 어려움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방송사·제작사·홍보사·연예인 소속사 등 이해관계와 계약으로 얽혀있는 경우에는 두 업체 사이의 '갑-을' 관계가 명확해, '을'인 하급 여성 노동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답도 있었다.

A작가도 비슷한 내용을 지적했다. 방송작가의 경우 프로그램 담당 PD에 의해 고용이 결정되는 프리랜서 신분이다. 대부분 계약서도 없이, PD 한 사람의 입김에 의해 일자리가 주어지거나 박탈된다. 직접 성추행을 당하고도 문제 삼기 어려운 구조에서, 일상적인 성차별/성희롱 발언에 항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여성연극협회 관계자들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연극계 성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미투(#Me_Too)운동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2018.03.08

설문 응답자들의 경력은 1년부터 30년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이들 중 오직 2명만이 성폭력 피해를 직접 경험한 적도, 목격한 적도, 피해 사례를 들은 적도 없다고 답했다. ⓒ 최윤석


'이력서 사진 쇄골 나오게 찍어라'   

A작가는 "방송작가들의 직업 교육기관인 작가교육원 강사조차 '남자 PD들이 이력서를 보니 이력서 사진은 쇄골이 드러나게 찍어라', '사진관 가서 찍지 말고 서로 쇄골 나오게 찍어줘라' 이런 말을 한다"고 전했다. 남성 출연진의 성희롱 발언, 성추행도 만만찮다.

이러한 상황은 작가 직군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중 95%(37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성폭력을 '예술'로 미화하거나, 영감을 얻기 위한 기행 정도로 용인하는 문화가 만연하다", "개인적 친밀함이 작업 환경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있다", "업계 특성상 공동체나 연대를 중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도 은폐하는 경우가 많다" 등의 이유를 전했다.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없다 보니 인간관계 내에서의 평판이 실력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하고, 많은 일자리가 인맥에 의해 연결된다. 때문에 이미 업계에서 자리 잡은 유명인이나 선배, 스승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응답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업계 내 성폭력 발생 요인 중 하나다.

이러한 분위기 탓에 여성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 역시 부당함을 힘껏 어필할 수 없는 처지이거나,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보니 '참아라', '네가 이해해라', '(저런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커리어가 쌓인다'는 조언 아닌 조언이 돌아오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 응답자는 "현장 분위기는 주로 남자들이 만든다"면서 "여성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형님 네트워크'를 만들고 '형님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성적 농담을 남발하며 유대를 쌓는다. 그 사이에서 여성들은 순종적인 꽃이나 예민한 여성으로 낙인찍힌 아웃사이더 중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성희롱 근절 콘텐츠 결재 요청에 '손 한 번 잡아주면...'

 <오마이스타> 미투 기획 기사 사진

비정규직 폐해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송가에 가장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존재하고, 미투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방송계 여성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모순. 방송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 Pixabay


응답자 중 87%(34명)는 미투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어 의미 있다", "곪은 게 터져 속이 시원하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작은 신호인 것 같다", "최소한 눈치 보는 상황은 만들어진 것 같다" 등의 이유였다.

응답자들은 업계 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은폐를 종용하는 분위기를 없애야 한다", "여성도 동등한 동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폭력 가해자의 확실한 퇴출과 처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인턴이나 비정규직 동료를 만만하게 보는 문화, 관리자의 말 한마디로 고용과 해고가 가능한 시스템, 군대식 위계 구조 등이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11%(3명)의 응답자는 미투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마녀사냥 같은 분위기"를 지적하는 답도 있었지만, "어차피 생태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다수였다. '업계 내 성차별과 성폭력 해결을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15%(6명)의 응답자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워낙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다들 조심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잊히면 또 반복될 것이다", "미투로 인한 또 다른 성차별(펜스룰 등)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은 동등한 동료로 존중받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이유였다.

A작가는 '방송가의 이중 잣대'를 지적했다. 비정규직 폐해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송가에 가장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존재하고, 미투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방송계 여성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모순. 방송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A작가는 "'성희롱 근절 캠페인' 관련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PD에게 사인을 받아야 했는데 '손 한 번 잡아주면 사인해주겠다'더라. 이 바닥은 그런 곳"이라고 냉소했다. 이어 "미투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뒤에도 섹스할 때는 여성 상위로 해야 하고, 모텔비는 여자가 내게 해야 한다는 '미투 안 당하는 법'을 웃기지 않느냐며 보여주더라"며 허탈해했다.

 미투운동

설문 응답자들은 업계 내 성 인식 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확실한 가해자 처벌'과 '성교육 시행'을 꼽았다. ⓒ 오마이뉴스


설문 응답자들 "가해자 확실한 처벌과 성교육 필요하다"

설문 응답자들은 미투를 전하는 언론을 향해 "언론이 2차 가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선정적인 상황 묘사 자제해라", "피해자의 아픔을 포르노처럼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가해자가 유명인인 경우에만 관심을 쏟는 것 같다", "대안 제시 없이 폭로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응답도 있었다.

또,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의 절박함이 있기 때문인데, 언제부턴가 피해자가 신상을 공개하고 주장해야만 신뢰를 얻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피해자의 이름이 가해자의 이름보다 더 많이 거론되는 것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우려도 나왔다.

마지막으로, 설문 응답자들은 업계 내 성 인식 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확실한 가해자 처벌'과 '성교육 시행'을 꼽았다.

일반 기업의 경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상시근로자 10인이 넘는 사업장의 경우 1년에 한 번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반드시 실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계약서도 없이 일하거나, 프리랜서 노동자가 많은 대중문화예술계에서는 성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화계의 경우에는 크랭크업 전에 전체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해야 하지만, 2016년 <걷기왕> 이전에는 한 번도 성희롱 예방 교육이 열린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시행하는 현장보다 시행하지 않는 현장이 더 많다.

확실한 가해자 처벌도 쉽지 않다. 지난달 23일 연출가 이윤택씨의 구속이 결정됐고, 5일에는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가수 김흥국의 경찰 조사가 있었다. 또, 배우 조재현, 영화감독 김기덕, 음악인 남궁연 등에 대한 경찰 조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 대한 '확실한 처벌'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간접 증거가 많아 입증이 어려운 데다, 워낙 오랜 기간 묵인되어온 탓에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건도 많다. 친고죄가 존재하던 시기에 발생한 건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직접 고소하지 않으면 경찰이 수사에 나설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여성학자인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미투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법에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한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권김 교수는 "피해자들은 우리 사회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냈다. 그 경이로운 선택과 용기 덕분에 견고해 보이던 구시대적 질서에 균열이 새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진 빚이 있다. 성폭행 피해를 폭로한 여성들이 그 용기에 대한 짐을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 역시 "제대로된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미투는 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될 확률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응답자들의 설문을 읽은 뒤 "대중문화예술계 내 성차별/성폭력 문제에 민감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설문에 응답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응답자 대부분이 성폭력을 경험하거나 목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는 일부 극소수가 경험한 특수한 일이 아니라, 업계에 만연한 문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나오고 있는 건 어떤 괴물 같은 개인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성차별적이고 부정의한 구조가 방치됐기 때문"이라면서 "악마 같은 개인들을 솎아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설문 답변에 있는 변화에 대한 기대는 '나도 변했다, 업계도 변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해줄 필요가 있다"고 분석하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대부분의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고 있고, 함께 분노하고 있다. 이 분노와 저항의 흐름을 제대로 짚어주어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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