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제주 4.3 사건 70주년이다. 다행히도 새 정부 들어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 국민적 관심을 받는 추념식이 개최될 예정이라 억울한 죽음을 맞은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70주년이 될 듯하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오래도록 숨죽여 왔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상흔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와 유족들. 이들의 아픔을 우리는 외면했다. 방송이라고 다를까.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통해 유시민 작가가 회고했고 JTBC <효리네 민박2>에서 이효리가 언급하면서 최근 4.3 사건에 대해 알게된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이전에는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다큐멘터리에서도 제주 4.3 사건을 다루는 일은 흔치 않았다.

1978년 서슬이 퍼렇던 유신 시대, 현기영 작가는 자신의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포문을 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제주 민중 항쟁> <잠들지 않은 남도> 등 출판연구 분야에서 4.3 사건에 대한 조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제주 지역 신문인 <제주일보>가 4.3 유족들의 증언을 다뤘다.

군사 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 유족들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 움직임이 시작됐다. 1993년 제주 4.3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9년 제주 4.3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4.3 특별법 제정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2일 국회의원 102인의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4.3 사건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던 1999년 9월 12일 MBC 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아래 <이제는>)는 첫 회부터 제주 4.3 사건을 다뤘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100부작 다큐멘터리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한국전쟁, 독재 정권까지 역사의 행간에 숨겨진 사건들을 복기한 이 프로그램은 실미도 사건 등을 다뤄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첫 방송에서 제주 4.3 사건을 다뤘다는 건, 그만큼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4.3 사건을 다룬 첫 번째 기록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 방송 이후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4.3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 속 숨겨진 진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운 이들은 12개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1999년까지 세간에 알려진 4.3 사건의 전부였다. <이제는>은 바로 이 문장에 대한 사실 검증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친일 경찰이었던 조병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서북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4.3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짚는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발포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면서 제주도 민심은 악화됐고 이는 95%를 넘는 농성 참여율로 이어졌다. 이에 미 군정은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서북 청년단을 파견해 무차별적 테러, 구금, 고문을 자행했다.

당시 미 군정은 남로당 중앙당이 계획적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민간인을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상황은 제주도민의 감정을 격화시켰고,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지지세력들과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는 것. 그러나 다큐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당시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 중앙당이 그런 무모한 지시를 내릴 리 없다는 것이다.


남로당 제주도당에는 사상과 이념을 따랐다기 보다는 폭행 당하지 않기 위해 가입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대응한 불가피한 무장 봉기로 봐야 한다고 <이제는>은 말한다. 또한 그 무장봉기조차 형편없었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50~60명 정도의 작은 부대 단위뿐이었고 당 조직체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죽창을 주요 무기로 삼았으며 소총은 겨우 한두 자루가 있을 정도였다. 미 군정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이기 위해 핑계로 댔던 무장봉기의 실상이었다.

<이제는>은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 무장 해지, 주동자들의 신변 보장'을 약속한 4.28 평화 협상을 결렬시켰던 5.1 오라리 방화 사건을 주목한다. 무장 폭도에 의한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회담은 결렬됐다. 하지만 생존한 오라리 주민들은 '당시 폭도의 만행을 증언했던 사람들은 오라리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동청년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의혹에 힘을 실은 것은 이미 불이 꺼져가는 상황인데도 경찰이 와서 주민들을 쏴 죽였다는 증언이다. 미 군정의 딘 소장이 제주를 극비로 방문한 이후, 귀순 작전을 펼치며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장군이 해임되고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된다.

비극이 시작된 이유, 5.10 단독 선거


<이제는>은 '민족적 비극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줄기차게 질문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바로 미국이다. 이후 공개된 미 군정 보고서에는 당시 경찰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고 쓰여 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제주도민의 70%가 좌익 혹은 그 동조자'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냉전주의적 시각에서부터 비롯된다.

미 군정 문건에 따르면, 5.10 단독 선거를 앞둔 미 군정은 자신들이 주도한 선거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남한 내 반공 정권에 대한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내에서 번지고 있는 반(反)정부적 움직임에 미 군정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결국 초토화 작전을 사전에 구상했다. 이를 위해 미군 정찰기가 제주도 상공을 수시로 정찰했으며, 함대가 제주도를 봉쇄했고 통신부대의 촬영은 미국의 편의에 따라 편집됐다.

5.10 총선거에서는 전국의 200여 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소요 사태로 인해 3개 선거구 중 2개가 투표율 미달을 기록하며 대표적인 단독선거 거부 지역이 됐다. 미 군정이 이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토벌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들어간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한라산을 기점으로 해안까지 빗질하듯 학살하기 시작했다.

농사일 등으로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즉결 처형됐고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 대신, 가족을 죽이는 '대살'이 횡행했던 토벌작전이었다. 사망 군인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예비 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암매장했다. 이때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집단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이제는>은 증언한다.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 군정은 4.3 사건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보고서에서는 1949년 6월 30일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 군과 경찰이 미군 통제 하에 있었다는 비밀협약이 드러났다. 또한 보고서에는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목적은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제는>은 냉전 대리전으로서의 한국전쟁과 그 리허설이었던 '4.3 사건'을 방조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승만 정부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이승만 정부는 일제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은 한편, 서북청년단을 경찰 인력으로 흡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탄압할수록 미국의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는 믿음 아래 민족적 비극에 앞장섰다고 다큐는 지적했다.

도민들은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동굴로 피신했지만 참혹한 시련들은 이어졌다. 들키지 않기 위해 우는 아기의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질식해 숨을 거두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만삭의 산모는 배를 드러낸 채 총살 당했고, 자식들이 모두 사살되거나 실종된 부모의 이야기도 등장했다. 제주도민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참혹한 교훈을,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첫 삽을 뜨던 해에 <이제는>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