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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3월 27일 오전 11시 35분]

앞서 미국의 Lake Norman 고등학교, 예일 대학 등에서 강리도를 탐구 학습하고 있음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경우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 대학의 동아시아학과에서는 강리도를 서양의 지도와 비교 탐구하는 강좌를 아래와 같이 개설한 바 있습니다. 강리도를 15세기 이태리의 수도승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만든 혁신적인 세계지도와 비교 검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프라 마우로 지도에 대해서는 좀 후에 살펴 봅니다.
토론토 대학 강좌
▲ 강리도 강좌 토론토 대학 강좌
ⓒ 토론토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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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난해 12월 7일 캐나다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토론토 대학생들의 고지도 탐구 결과를 포스터로 전시하여 이목을 끌었습니다.

"동아시아학과 학생들이 지도의 경이를 드러내다! 12월 7일 동아시아 지도 전시회가 도서관에서 열렸다. 동아시아학과생들은 아름답게 디자인된 포스터 전시를 통해 다양한 탐구주제들을 소개했다." -토론토 대학-

강리도 전시
▲ 토론토 대학 지도 전시회 강리도 전시
ⓒ www.eas.utoront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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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의 노란 톤의 지도가 강리도입니다.

강리도 전시
▲ 토론토 대학 지도 전시회 강리도 전시
ⓒ www.eas.utoront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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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에는 강리도, 아래 쪽에는 천하도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강리도 전시
▲ 토론토 대학 지도 전시회 강리도 전시
ⓒ www.eas.utoront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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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강리도와 중국의 <대명 혼일도>(오른쪽)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의 동서양 지도를 통해 동서양의 세계관과 사고 방식을 살펴 보는 것이 이 전시회의 주제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을 느끼게 됩니다. 과연 조선의 놀라운 지도인 강리도를 전후하여 서양에서는 어떤 지도들이 그려졌으며 그것이 드러내는 세계상은 어떤 모습이었까?

먼저 중세 서양의 세계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세계지도의 역사에 관한 대작 <지도의 역사>(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를 편찬한 우드워드(Woodward)의 설명을 들어 봅니다.

"지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그러나 그 창의 형태와 위치 그리고 창이 제공하는 시야는 지도 제작자가 결정한다. 지도란 세계를 객관적으로 측량한 이미지라는 것이 통념이지만, 그건 단지 진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문명권에 따라 지도는 각각 달리 그려진다.

그리스 로마 시대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돈강(Don River)으로 여겼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분계선을 나일강으로 간주했다. 2세기 프톨레미가 지은 <지오그리피>는 지도 제작법에 큰 영향을 미친 저작인데 여기에서 그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분명히 나누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홍해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는데 까닭인 즉, 이집트가 두 동강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나일강을 기준으로 자르면 이집트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나뉘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마파문디(Mappa Mundi)라 불리는 중세 유럽의 세계상에도 표현되어 있다. 마파문디는 지구를 대문자 O안에 T자를 넣어 셋으로 분할한다(이런 유형을 T-O지도라 함). 이 세 지역에 각각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거주한다. 아시아는 셈족, 아피라카는 함족, 유럽은 야벳족이다. 세 대륙의 크기를 보면 아시아가 단연 크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쳐 놓은 것만 한데, 이는 노아의 장남 지위와 걸맞는다. 마파문디는 아시아를 지도의 맨 위에 놓고 있는데 이유가 있다. 동쪽은 기독교인들에게 성스러운 곳으로서 에덴 동산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5~16세기에 프톨레미의 저작이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고 인쇄되면서 세계의 3개 분할상이 일반화되어 갔고 16세기에 들어서는 프톨레미 지도 스타일이 세계지도의 모델로 정립되었다. 한편 남·북아메리카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가로놓인 별도의 대륙으로 자리 매김 되자 기존의 세계상에 네째 부분이 추가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기에는 지구의 네 개 부분을 묘사한 벽걸이 세계 지도가 가정집 인테리어 장식으로 유행하였다. 이렇게 세계의 공간 구도가 정형화 되어 갔다. 그 결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 내의 문화적 차이가 지나치게 획일화되었으며 아울러 네 대륙의 분별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David Woodward 16쪽


서양 지도와 강리도 비교해보니

이제 지도의 실제 이미지를 통해 강리도와 서양 지도를 비교해 봅니다. 먼저 중세 서양의 세계상인 T-O지도를 봅니다.

중세 서양의 세계상
▲ T-O 지도 중세 서양의 세계상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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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 (Shem), Iafeth (Japheth), Cham (Ham)이 적혀 있습니다. 7세기의 이시도르(Isidore) 신부가 자신의 책에 그린 것으로서, 1472년에 프린트되어 나왔습니다. T-O 지도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도에 따라 여러 지도들이 만들어 집니다. 물론 성서와 기독교의 세계상을 나타냅니다.

다음은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T-O유형의 지도입니다. 영국의 히어포드 성당에 보존되어 있어 'Hereford Mappa Mundi'라 불립니다. 에덴 동산이 있는 동쪽이 위를 향하고 있고 예루살렘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을 육지가 가득 채우고 있어 바다로 넘나들 수 없는 형상입니다.

중세 서양의 대표적 지도
▲ Hereford Mappa Mundi 중세 서양의 대표적 지도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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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15세기 후반부터는 프톨레미 유형의 지도들이 인쇄본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에 따라 유럽인의 세계상이 정립되어 갑니다. 지도 제작자들은 자신의 지도에 '프톨레미 지도'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즐겼습니다. 그만큼 프톨레미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지리 정보나 형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갱신되어 갑니다. 강리도의 경우도 네 개의 버전이 모두 그 세계상은 같지만 지리 정보 및 일부의 형상이 약간 다르다는 점에서 프톨레미 유형의 지도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강리도의 전통은 단명했고 프톨레미는 장구했지만.

이제 프톨레미 유형의 지도 실물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지도는 유럽에서 15세기 초에 나온 것으로서 유럽만을 놓고 보면, 이것이 최초의 프톨레미 지도입니다.

15세기 초 최초의 프톨레미 지도
▲ 프톨레미 지도 15세기 초 최초의 프톨레미 지도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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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세 유럽의 T-O 지도 및 르네상스기의 프톨레미 세계상과 강리도를 비교해 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양의 모습입니다. 히어포드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가 바다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띠로 둘러싸여 있지만 대서양과 인도양이 서로 열려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한편, 프톨레미 세계도에서는 아프리카의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고 육지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봉 일대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대서양과 인도양은 통해 있지 않고 인도양은 육지에 갇힌 내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프톨레미 지도는 유럽인들에게 오랫동안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 인도양을 내해로 여기는 프톨레미의 세계상이 깨지기까지에는 무려 130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이제 한양에서 1402년(서양에서 프톨레미 지도가 나오기 전)에 그려진 강리도에서 아프리카 남쪽과 주변 바다를 주목해 봅니다. 아프리카 남단이 광할한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방의 바다와 훤히 통해 있습니다. 그 점에서 현대의 세계상과 잘 부합합니다.

강리도 디지털본
▲ 강리도 강리도 디지털본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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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서 언급한 프라 마우로 지도 실물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남쪽이 위를 향함
▲ 프라 마우로 세계도 남쪽이 위를 향함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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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1459년에 이태리인이 만들었지만 중세의 아랍 지도처럼 남쪽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남단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프톨레미의 틀을 벗어났고 그런 측면에서 획기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남쪽이 동쪽을 향해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당시 다른 많은 지도들도 그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형상이 서양지도에서 수정된 것은 16세기에 와서입니다.

이런 측면만 보더라도 우리는 강리도가 보여주는 세계상이 얼마나 앞서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100년 후인 1502년의 서양 지도를 보면 동서의 선후와 우열이 바뀌고 있음을 또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호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강리도의 지명 탐험으로 전환합니다. 강리도의 아프리카에는 지명이 30여개 나옵니다. 그 중에서 카사블랑카, 카이로, 멤피스, 알렉산드리아, 푸아 등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의 '지도와 인간사'에서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 나일강의 원천을 탐험해 볼 참입니다. 서양지도는 물론 이슬람권 지도에서도 '달의 산'이 나일강의 원천으로 그려져 있고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이슬람 지도가 서양지도 보다 훨씬 먼저 '달의 산'을 실었지요.

어쨌든 전설적인 '달의 산'은 19세기 초까지도 일부 서양 지도에 나타납니다. 그만큼 생명이 길었습니다. 그 원조는 프톨레미 지도입니다.

아래 지도는 1802년도 것인데 나일 강의 수원을 'Mountains of the Moon'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달의 산
▲ 달의 산 달의 산
ⓒ www.jasoncolavi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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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의문은 이런 것입니다.

"과연 한양에서 15세기에 선비들이 붓으로 만든 강리도에 '달의 산'이 나일강의 원천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지명이 기록되어 있을까?"

다음 번에 같이 탐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태그:#강리도, #프톨레미, #달의 산, #중세 서양 지도,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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