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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로 들이닥친 전시를 준비하느라 발등에 불 떨어진 내 시골 원룸 작업실에 있다보면 문득문득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언제쯤 월세 걱정 없이 나를 먹일 우윳값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이렇게 앉아서 그림을 그릴 시간과 공간이라도 허락 받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으니 지금은 천국이다 행복한 생각도 든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야간작업을 허용해주지 않았던 터라 선배들로부터 몇몇 비밀 잠입통로들을 전수 받은 나는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부족한 작업 시간을 채워내기 위해 나 나름의 방식으로 학교에 잠입하여 야간 작업을 하였다. 밤이면 더욱 무시무시해 보이던 인체 작품들이 즐비했던 조소과의 야외 계단을 이용한다든가, 높게 난 창문으로 작업대와 창문 안쪽의 캐비넷을 발판삼아 들어간다거나 하는 등의 방법들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문이 잠겨 있으면 그냥 그대로 낭패를 보고 이미 잠겨 버린 기숙사로는 들어갈 길이 없으니 T동의 24시간 도서관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특히 내가 즐겨한 방법은 미리 학교 문이 잠기기 전에 들어가서 새벽 12시 즈음 학교 수위 아저씨들이 순찰을 도시는 시간 직전에 천장과 거의 맞붙을 정도로 높은 작업실 복도의 캐비닛에 숨어 기어 올라가 아저씨들의 순찰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는데 그 위에서는 천장과 나란히 바짝 누워 쪽잠을 잘 수도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밤의 지하철은 너무 붐비어서 1시간 되는 거리라도 보통은 앉아서 졸고 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시험이나 리포트가 임박해서 어차피 도서관에서 밤을 새야 하지 않는 시기엔 이 달콤한 미션이 성공하면 아주 명료한 정신에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진작에 고향을 뒤로 서울과 온양과 수원을 지나 구미로 이사를 와서일까, 어차피 내게 고향이라는 곳은 불분명하였으니 큰 도시 서울에 혼자서 가족이 없는 그 곳 내 집이란 것도 머리 뉘일 어디라고 생각해도 좋았던 것 같다. 종이 한 장 언제든 그 위를 탐험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언제고 나를 왕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졸업 후로도 10여년을 서울에서 간신히 작업과 삶을 이어갔다. 누군가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면 그림만 그렸으면 좋겠다는 졸업시절의 나의 바람대로 나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은 내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다 연이은 가을 장마 물에 젖어 들어가는 반지하의 작업들에 마음이 쓰려 나는 시골로 다시 밀려 이사를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미술은 곧 최소한의 생활과 내 작업을 해 나가는 시간을 허락해주는 그런 수입원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내가 가진 에너지도 이십대와는 달라져 있었다. 나의 부모 역시 나이가 들어 갔다.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나의 동네에서 나는 아무 학원에나 연락하여 연락이 온 학원에서 곧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 맞부딪쳤다. 나는 그림에 대해 누가 시키지도 않은 큰 책임감에 괴로웠으며 그것은 나의 유일한 괴로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의 온 에너지와 애정의 대상은 응당 내 부끄러운 작업들보단 사랑스런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수가 점점 많아졌고 나는 그게 꼭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도 사실 너무 재미있었다. 영어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난 학원이 참 좋았다. 그러던 터에 스웨덴에서 날아온 초대의 편지는 밀리듯 내딛던 발의 방향을 다시 다잡아 주어, 그제사 나는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더는 내 눈에 주위로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모르는 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삼십 중반은 훌쩍 넘어서, 정기적 수입원이 되던 일과 주변에 느끼던 무겁던 책임들은 내버려놓고, 정착을 위해서가 아닌 아주 잠시의 머무름을 위한 낯설고 먼 곳으로의 이 여행은 나에겐 랜덤하게 떨어진 기적처럼 삶의 방향을 전환시켜 놓았다. 막연한 두려움도 없진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 어디에서건 늘 내 주위에서 잡초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느끼던 그 많은 책임감이나 무게들은 정작 내가 기르고 싶었던 정원 중심의 나무가 아닌 그 주변의 잡초나 울타리 같은 것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어도 그리움은 때대로 묻어났을지는 모를 일이나 세상 각자 그런대로들 잘 돌아갔다.

그림을 전공하던 시절부터 학업과 작업을 위한 다른 벌이를 꾸준히 이어오던 바쁜 삶 안에선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배제되기 마련이었다.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삶의 다른 기회들은 읊조리듯 스스로에게 나중에 나중에를 말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관념속에서만 이미지를 만들어올 뿐이었는데 이제 조금씩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아직은 혹은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누구인가 발견해간다. 가난한 내 작업실에서 역시 막연한 두려움을 가슴에 품고서 이제 곧 봄이구나 라고, 아직 추운 2월의 길목에서 곧 40을 기대하는 내 마지막의 30대를 돌아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행복한 것 같다 라고 다짐시킨다.

필명으로 사용하는 피지올로구스란 '자연에 박식한 자'라는 뜻으로 구전과 민담을 통해 내려오는 동식물에 관련한 정보와 그림을 묶은 중세시대 지식인들의 베스트셀러인 일종의 백과사전적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건강세상네트워크 웹진 <시민과 건강을 '잇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잇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건강권, #보건의료,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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