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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운동이 불붙고 있던 며칠간 주변 남성들에게 볼멘소리를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미투(#MeToo) 운동이 불붙고 있던 며칠간 주변 남성들에게 볼멘소리를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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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운동이 불붙고 있던 며칠간 주변 남성들에게 볼멘소리를 듣는 일이 왕왕 있었다.

"앞으로는 다 만져도 되냐고 동의서 받아야 되게 생겼어. 서면으로 작성하고 헤어질 때 사인이나 지장 받고."

"이제 매번 다 물어봐야지. '제가 지금 OO님의 손을 잡으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 오른손을 뻗어서 OO님의 왼손을 붙잡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그냥 여자를 만나지 않아야겠어."

물론 그런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사회 적응력이 부족하다면, 동의서를 받거나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타인에게 부지불식간에 성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보다는 동의서를 받아가며 관계를 진전시키는 사회적으로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 동의서를 받는 형식을 상대방이 불편해하면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면 될 것이고.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주변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이 그 정도로 사회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동의서 이야기까지 하며 동의과정을 복잡하게 가정하는 건 오히려 이런 '불편한' 세상이 오는 건 부당하다는 항변이며, '유난스러운'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불평들은 때로 연애와 성폭력은 혼동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분명히 연애였던 것이 어느새 성폭력으로 둔갑하는 일이 잦으며, 그것들은 칼처럼 구분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물론 서로 간에 모호한 소통의 벽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0%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정말로 '연애' 사건이었던 것을 추후에 '성폭력'으로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 보았을 때, 어딜 보아도 성폭력인 것이 가해자의 기억 속에서만 연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에 보았던 "미안하다, 괘념치 말라"고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합의 하에 한 관계였다"고 기억하는 사례 같은 것이 그렇다(안희정 전 지사는 이후 자신의 SNS를 통해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음날 또 다시 안 전 지사 측 신형철 전 비서실장은 해당 글이 '그저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집자주).

누군가에게 주먹질을 하고 나서 그 주먹질이 진정한 우정의 확인이었다고 혼동하는 사례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성폭력은 폭력과 관계 그 자체가 혼동되곤 하는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펜스룰' 관련 만화. 사진은 두 컷을 이어붙인 것.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펜스룰' 관련 만화. 사진은 두 컷을 이어붙인 것.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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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성폭력'만 진위를 의심받는 이유

여타의 폭력과 성폭력이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지점이라면 '성'이라는 대상의 특수성이 있을 것이다. 원해서 주먹질 같은 물리적 폭력을 합의 하에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나, 성폭력이 아닌 섹스는 서로가 원한다는 합의 위에 성립한다. 행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폭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자기결정권을 빼앗아야만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자기결정권을 빼앗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발생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가 주려고 하지 않은 물건을 강제로 가지고 가면 강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내가 받겠다고 하지 않은 약물을 강제로 내 몸에 투여하면 누가 생각해도 폭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받겠다고 하지 않은 접촉과 섹스의 문제에서는 왜 논란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어째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에서만 폭력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게 되는가?

언젠가 SNS에서 한 일본 여성이 쓴 글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그녀는 "우리는 '싫다(いやよ), 안 된다(だめ)'는 거부의 말조차도 빼앗겼다"고 썼다. 한국에서도 일본의 포르노그래피인 AV를 본 사람들이 종종 저 말을 따라하며 AV 배우 흉내를 내곤 한다. 이야요, 다메. 일본어로 이 말은 명백한 거부의사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이 말을 성애화해서 소비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종류의 농담은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안돼요돼요돼요돼요" 나 "오빠 못 믿니" 같은 농담들은 여성들의 거부는 진정한 거부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 이 사회는 여성들의 거부를 진정한 거부로서 받아들이지 않아 왔는가. 사회적 관념 속에서 여성들은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주의 내부에서 여성성은 그 자체로 성취의 대상이다. 자연물에게 "너를 채집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고 채집하지 않듯, 여성성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 속에서 남성들은 전 생애에 걸쳐 여성성을 성취하는 행위에 대해 '남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는다.

바로 이 맥락에서 여성은 성에 있어 무지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비주체적인 존재로서 오랫동안 위치 지어졌다. 성적 요청에 대해서 좋아하면서도 일단은 거부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성적 주체가 아니라 자원으로서의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이 이미지에는 성적 자원을 성취하기 위해 열망하는 남성 주체와 약탈당하지 않고 성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여성 객체라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있다.

이런 인식 위에서 성적 관계는 폭력이 되기 쉽다. 그렇게 폭력적 언행은 자체로 성적 코드가 된다. '벽치기'가 로맨스 드라마의 주된 레퍼토리가 되고,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 열렬한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가 된다. 남성들은 끊임없이 여성의 신체를 소유하고 지배하기를 요청받는다.

세상은 그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해석한다. 수많은 대중문화에서 여성들은 거부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열망하는 남성에게 쟁취 당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포르노그래피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로맨스 서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는 사회의 생김새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는 실제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가부장주의가 여성성을 객체로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은 사고하고 움직이며 결정하는 주체다. 여성성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삶 속에서도 원하지 않는 성적 관계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원하지 않는 성적 관계는 명백하게 존재한다. 여성들은 단지 '따먹히는' 객체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남성들이 맺기를 요구받은 성적 관계는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많은 남성들은 이때 여성에게 분노한다. 당연히 받을 수 있으리라고 전제한 성적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남성들은 객체로 남지 않은 여성들을 "꼬리쳐놓고 발뺌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어떤 남성들은 여성의 거부를 무시한다.

SBS <우리 갑순이> 속 한 장면.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 갑순이(김소은 분) 남자 주인공인 갑돌(송재림 분)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앞서 간다. 그 뒤를 갑돌이 쫓아온다. 갑돌은 갑순의 팔목을 낚아채고 거리 한 쪽으로 끌고 가 강제로 입을 맞춘다.
 SBS <우리 갑순이> 속 한 장면.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 갑순이(김소은 분) 남자 주인공인 갑돌(송재림 분)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앞서 간다. 그 뒤를 갑돌이 쫓아온다. 갑돌은 갑순의 팔목을 낚아채고 거리 한 쪽으로 끌고 가 강제로 입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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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감정이 있었다는 말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의 자기변명으로써 "연애감정이 있었다"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을 약취하려는 의도라면 폭력이었겠으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자행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연애감정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가해자의 머릿속에서 그 모든 폭력적 행위들은 오로지 열렬한 마음으로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서 나온 행동일 뿐이다. 상대방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 사랑은 불가능하다. 객체로서의 여성만을 상정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폭력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단지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남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행동을 했을 뿐인데, 이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사고의 결론으로 도출되는 것은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냐'는 분통 터지는 외침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썸도 못 타고, 연애도 못 타고, 섹스도 못 할 거라며 미투(#MeToo) 운동에 대해 화를 내는 수많은 남성들이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성폭력을 저지르던 이들은 정말로 '연애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긴 세상에서는 그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연애감정이란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다. "넌 내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의 신체와 마음을 규율할 자격을 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폭력적인 형태로 연애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고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앞에서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과연 사랑인가' 하는 질문이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구애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사랑을 얻기 위해서, 사랑을 주어야 할 상대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그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이 사회가 말해왔던 사랑이라는 게 틀렸던 건 아닐까.

사랑할 줄 아는 남성을 구함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에서 벨 훅스는 한 챕터에 "사랑할 줄 아는 남성 구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부장주의 속에서 남성들은 사랑할 능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성을 성취해야 할 존재로 상정하고 있는 이상, 누구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지배하고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분노한다. 여성들은 그 분노 속에서 '된장녀'나 '김치년', 혹은 '꽃뱀'이 된다. 이 관계 속에서 바람직한 여성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타자에게 귀속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여성이다. 남성의 폭력을 열렬한 구애로 이해하고, 자원으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여성이다. 이 인식 위에서 주체적 개인들의 사랑이란 가능하지 않다.

미투는 더 이상 그런 폭력을 '연애감정'의 이름으로 용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런 구애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사회가 지금껏 맺어왔던 가부장주의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남성들의 두려움과 달리, 나는 이 선언들 속에서야말로 사랑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본다.

두려움, 분노, 폭력의 이름으로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이 지난한 싸움 끝에서 어쩌면 우리는 폭력 속에서만 성애를 맺어왔던 지금까지의 세계를 걷어치우고, 소유하지 않는 관계로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SNS에서 미투에 대해 '이런 식이라면 연애는 어떻게 하냐'고 투덜거리거나 불안해하는 글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고발들은 사랑을 종결시키기는커녕, 사랑을 간곡하게 요청하고 있다. 폭력을 연애로 여기지 않는, '사랑할 줄 아는 남성 구함'.


태그:#페미니즘, #미투, #METOO, #펜스룰, #연애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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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씁니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혹은 그 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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