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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있는 정원, 예술로 승화된 정원

1748년,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의 유적을 기록한 <보길도지>에는 고산 윤선도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뱃놀이를 했다고 적혀 있다.

고산은 "하루라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며 당 위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고,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건너편 산 옥소대에서 긴 소매 차림으로 춤추게 했다.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하고, 세연정에서 풍류를 즐겼다.
▲ 세연정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주로 생활하고, 세연정에서 풍류를 즐겼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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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이러한 무대 장면의 연출로 세연정 일대는 단지 회화적 풍경에 머물지 않고 음악적 요소가 어우러진 예술의 세계가 된다. 고산은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는 한 이런 풍류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음악이 없는 정원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에선 노래가 곧 풍경이 되었고, 그 풍경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윤선도가 조영한 정원은 세속에 물든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가 무대에서 펼친 예술 세계는 세속을 벗어나려는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다. 사방에서 음악이 울리고 너울너울 춤사위가 펼쳐지는 가운데 뱃놀이에서 감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회화와 음악이 어우러져 풍경의 아름다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못 중앙에 배를 띄우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한다. 노를 저어 뱃놀이를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정원 가득 울리고 못 속에 비친 그림자는 이미 세상 밖의 풍경이다. 세상사는 자연 잊고 만다.

고산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 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 세연지 고산은 세연지에서 제자와 동자 들과 함께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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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곱게 일렁이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청 지국청 어기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다가온다

어부가 없는 <어부사시사>는 시로 그려진 그림이다. <어부사시사>에서는 세연정 일대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풍경을 노래한다. 동대에 가까운 계담이 동호이고, 서대에 가까운 회수담이 서호임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는 풍경을 시로 지어 그림처럼 묘사하고 노래를 불러 합일된 세계를 창조한다. 걸음마다 시상을 떠올리며 노래하고, 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한다.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여기가 어디메뇨"라는 대목에서는 세연정과 낙선재를 넘어 자연 속에 살고자 하는 호방한 기개마저 보인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어촌의 사계절을 노래한 단가(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
▲ 어부사시사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어촌의 사계절을 노래한 단가(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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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처럼 뱃놀이를 할 수 없더라도 세연정 일대를 느릿느릿 산보하며 <어부사시사>를 노래해 보자. 그럼, 윤선도 원림은 눈으로만 보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눈으로만 보는 '시경視景'이 아닌 시로 읽는'시경詩景', 고산이 꿈꿨던 세계가 당신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가였다. 그가 언제부터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부용동 등 오십 대부터 평생에 걸쳐 정원을 조성했으며 그가 조성한 정원들은 하나같이 빼어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개인이 조성한 정원의 수나 아름다움에서 고산을 넘어서는 사람은 없다. 고산은 머무는 곳마다 아름다운 산수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을 즐겼다.

쌍도정도는 성주 관아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정원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성주 목사 재임 시절에 이 쌍도정 정원을  건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쌍도정도 쌍도정도는 성주 관아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정원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성주 목사 재임 시절에 이 쌍도정 정원을 건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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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원을 조성한 시기를 보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고산은 쉰한 살이던 1637년(인조 15)부터 여든다섯 살인 16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곱 번 부용동을 드나들며 십삼 년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리고 빼어난 안목으로 길이 남을 정원을 만들었다.

고산이 정원 조성에 뜻을 둔 건 이이첨의 전횡을 공박한 <병진소>로 인한 첫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 연동으로 이주했던 1627년으로,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정원을 조성하기보다는 대둔산, 두륜산 등 해남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였다.

입향조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을 이어왔다.
▲ 녹우당 입향조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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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산이 쉰한 살이던 1637년부터 바다 가운데 섬 보길도에 본격적으로 부용동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쉰세 살이던 1639년에 해남의 집 가까운 산속에 문소동을, 산속 계곡에 수정동을, 산 정상부에 금쇄동을 조성했다(고산은 문소동, 수정동, 금쇄동을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했다). 이 모두 세상을 벗어난 탈속의 공간이었다.

그중 부용동은 가장 규모가 크고 고산이 최후까지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주요 생활공간이었던 낙서재와 풍류를 즐겼던 세연정,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동천석실을 매일같이 오가며 그는 자신만의 정원 생활을 즐겼다.

당대 최고의 풍수가

고산이 죽은 후 정조는 <홍제전서>에서 그를 조선조에서 무학 대사 이후 가장 뛰어난 풍수가로 높이 칭송했다. 고산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여러 곳을 답사하고 길지吉地로 추천한 곳은 수원 땅이었는데, 정적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뒷날 정조가 고산이 추천한 곳을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화성 융릉이다.

지금의 화성 융릉은 원래 윤선도가 효종이 승하했을 때 길지로 추천한 곳이었다.
▲ 사도세자의 융릉 지금의 화성 융릉은 원래 윤선도가 효종이 승하했을 때 길지로 추천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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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풍수지리에 능했던 건 가풍의 영향으로 보인다. 해남과 강진 일대에는 해남윤씨의 시조 윤존부와 중시조 윤광전을 모신 한천동, '해남'이라는 본관을 정한 득관조得貫祖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난 덕정동, 윤효정 이래 오백여 년간 이어온 녹우당이 있는 백연동(연동마을)이 있다.

해남윤씨가 거주했던 이 세 곳은 풍수지리의 원리를 잘 반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산은 이러한 해남윤씨 집안의 가풍으로 전해온 자연 친화적인 풍수 사상과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잘 계승하여 문학적, 사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정원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동마을 녹우당 입구에 조성된 백련지에 핀 연꽃
▲ 백련지 연동마을 녹우당 입구에 조성된 백련지에 핀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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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윤선도가 부용동 등의 정원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재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녹우당의 입향조 윤효정은 해남 지역의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해남정씨 정귀영의 딸과 혼인하여 막대한 재산을 분배받아 당시 남녀 균분 상속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게다가 윤선도는 생부인 윤유심과 양부인 윤유기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크게 불리게 된다. 노비만 해도 육백 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당시 해남윤씨 집안은 서남해의 바다를 적극적으로 경영했는데, 윤선도는 진도 굴포에 약 이백 정보, 보길도 바로 옆 노화도에 약 일백삼십 정보를 간척하기도 했다. 부富에 대해 등한시하지 않은 그의 실용적인 경세치용사상을 엿볼 수 있다.

녹우당 사랑채는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효종이 하사한 건물이다.
▲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 사랑채는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효종이 하사한 건물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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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스스로 <금쇄동기>에서 "천석泉石은 역시 마음속의 일일뿐만 아니라 재정이 있어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물론 그의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을 했지만 그의 남다른 자연관이 없었다면 원림을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금쇄동기>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산수를 사랑하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반드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나 또한 스스로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음악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재산은 고기이고, 천석은 음악과 같다. 나의 취하고 버림이 진실로 이러한 뜻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윤선도가 시문집인 <산중신곡>과 함께 금쇄동에 지내면서 금쇄동의 경관을 상세히 서술한 수필집
▲ 금쇄동기 윤선도가 시문집인 <산중신곡>과 함께 금쇄동에 지내면서 금쇄동의 경관을 상세히 서술한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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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산이 정원을 조성한 것은 그가 겪은 시대의 시련과 개인적 아픔, 잦은 유배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네 번의 전쟁이 준 성장기의 정서적 혼란, 세 번에 걸친 십오 년에 가까운 긴 유배 생활에서 겪은 좌절감, 생모, 양모, 생부를 잃은 개인적 슬픔,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이었지만 파란만장했던 벼슬의 허망함 등을 겪으면서 고산은 산수간을 찾아 긴 은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번 기사는 지난번에 이어 보길도 부용동 정원에 관한 세 편의 기사 중 두 번째입니다. 다음 편에서 부용동 원림의 핵심 공간인 낙서재와 동천석실, 윤선도 원림 관람법을 소개하며 세 편의 기사를 마칠 예정입니다.



태그:#보길도, #부용동 원림, #윤선도, #어부사시사, #금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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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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