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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괴롭고 아픈 나날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미투는 이제 경악과 분노의 수준을 넘어 버린 듯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튀어 나오는 이 더럽고 추악한 범죄들은 너무나 비릿하고 역겨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다.

"요즘은 맨날 저 뉴스네."

미투 관련 뉴스를 보던 한 지인이 조금은 지겹다는 투로 내뱉었다.

"시작에 불과해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야 하고 그럴 거예요. 참고 당한 세월이 얼만데. 자기 딸, 아내, 어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세요."

공연히 부아가 나서 지청구를 놓고 말았다. 이제 정치권에서도 무언가 터지겠구나 했는데, 급기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터졌다. 아무 생각 없이 TV를 틀었다가 헤드라인 뉴스로 그 소식을 접하곤 한동안 멍했다.

그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정치인으로서 좋은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여겼기에 보통 이상의 배신감과 충격이 느껴졌다. 정돈되지 않는 마음으로 무겁게 인터뷰를 지켜보면서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그 마음조차 역겹게 느껴졌다. 선한 얼굴과 정의로운 말은 얼마나 배신당하기 쉬운 가면인지.  

성폭력 시도한 방송사 PD,  성추행 하던 잡지사 사장

그런데 3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전에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3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전에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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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20대 때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PD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우직하고 곰처럼 듬직하던 한 PD는 동료는 물론 작가들 사이에서도 꽤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다. 나를 비롯해서 어울리던 다른 작가들도 그 PD를 따르며 종종 어울렸는데, 하루는 친구가 울면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PD가 친구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이야기였다.

여느 때처럼 여러 명이 술을 함께 마시고 나서 집에 갈 때, 그 PD가 친구를 집에 데려다 준다면서 택시에 태웠다고 한다. 그리고 간 곳은 여관.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도무지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더니 그제야 정신차리고 풀어주었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갑자기 성폭행을 당할 뻔 했던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꿍꿍 앓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도 함께 분노하고 우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물 네 살의 비정규직 막내 작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었다. 계속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친구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덮어버리는 것은 심지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러면 어떡하지?"

친구와 나, 똑같은 마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결국 친구는 그날의 사건을 덮어버렸지만, 그 일 이후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30대 때였다. 일하던 잡지사의 사장님은 50대의 나이에 비해 열려 있고 젠틀한 분이었다. 외부적으로도 나름 존경받는 인사였고 사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3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전에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싶어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킨십의 강도가 세지기 시작했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름 방법을 강구했다. 사장님 방에 들어갈 때 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사장님이 일어나서 방문을 닫고는 자리로 돌아오면서 내 등을 쓰다듬는데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내가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밤잠을 설치며 고민을 거듭했다. 정색하고 말했다가 밉보여서 잘릴까봐 겁이 났고,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기에는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불쾌감과 수치심 때문에 괴로웠다. 회사에 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결국 사표를 쓰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방법으로 사장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사장님, 요즘 저를 격려해 주시고 싶은 마음에서 스킨십을 자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싶진 않은데, 그런 스킨십이 계속 되면 제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습니다. 만약 저를 격려해 주고 싶으시다면 가볍게 어깨만 두들기시거나 수고한다고 말씀으로 격려해주세요. 그러면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장님은 내 말을 알아들었고, 그날 이후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나마 사장님이 그 선에서 멈춰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누군가는 내가 점잖게 잘 대처했다고 하지만, 사실 난 그때를 생각하면 좀 부끄럽다. 왜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의 마음이 상할 것을 헤아리면서 좋은 말로 타일렀나 싶어서. 내 몸에 손을 대는 행위에 정색하며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당신들은 절대 모른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 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과 여성인권단체 관계자들이 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미투'지지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 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과 여성인권단체 관계자들이 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미투'지지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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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끼리 성희롱, 성폭력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당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경험들은 개인의 삶에 크고 작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긴다. 엄청난 사건인데 도움을 요청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가해자의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있다. 부당함에 저항하려면 내 밥줄과 인생을 걸어야 하는데도 세상은 가해자에게 훨씬 더 관대하다.

김지은씨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다음날 피해자를 향한 온갖 말들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기가 막혔다. 인터뷰 후에 피해자의 말투와 표정을 캡처해서 감별하고 다닌다는 소식이었다.

안희정 스스로 "합의에 의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인정했는데도, "피해자 표정이 이상하다" "공작의 냄새가 난다"는 등의 댓글들도 꽤 많았다. 그 중 제일 기가 막힌 말은 "안희정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

생각해 보니 요즘 미투 운동에 의구심을 품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거였다. 오달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고은 선생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가해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이룬 업적과 그들의 인생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가해를 저질렀을 때 인생이 흔들려야지 피해를 입었을 때 인생이 흔들리는 게 말이 되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성기를 전시하며 옆에 앉은 여성을 주물러 대는 괴물을 보며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저항하기 힘든 권력에 유린당해 몸과 정신, 인생 모두 폐허가 된 사람, 더구나 그 고통이 현재 진행형인 사람의 눈빛과 표정, 언어에 담긴 혼란과 절망, 수치, 두려움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여성들의 미투 고백을 들으며, 나를 비롯해 여성들은 기가 막힌 마음으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죄 지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게 범죄인지도 모르는데, 드러나는 성범죄가 내가 당한 일 같은 여성들은 잠 못 드는 요즘. 그래도 낫고 있는 중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더 당당하고 단호해져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여전히 아픈 불면의 밤을 지나고 있다. 


태그:#미투, #성폭력, #성추행, #안희정,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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