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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소방대 앞에서 고함이 들렸다. 창고에 있던 이들은 무슨 소리인지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창고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지고, 창고 밖에서의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렸다. 아니 일부러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듣게끔 창고 입구에서 크게 떠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야 이××야! 동생 어디에 숨겼어?"
"저는 모릅니다."
"이 ××가 좋은 말로 하니까 듣지 않는구만."

진선무(가명. 당시 27세) 지서장은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순경에게 "이×× 정신 차리게 해줘" 라고 지시했다. 옆에 있던 순경은 나무 몽둥이로 김용립을 내리쳤다. 매타작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창고 안에 있던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몽둥이로 맞는 것인 양 깜짝깜짝 놀랐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김용립이 비명소리를 낼 때마다 몸이 움칫거렸다.

잠시 후 창고 밖에는 목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김용립의 성기를 진 지서장이 펜치로 비튼 것이다. "야! 그래도 안 불래"하며 펜치를 더 비틀었다.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김용립의 얼굴에서는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그의 성기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김용립의 입에서는 비명소리만 나올 뿐 동생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생 김용각이 어디로 피신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1950년 7월 9일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강내면 의용소방대 앞에서 있었던 성고문 현장의 풍경이다.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지서에 구금하라는 청주경찰서장의 명령을 받은 진 지서장이 저지른 짓이다. 강내면 보도연맹원을 전부 소집시켰는데, 몇 명이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이고 그 중 한 명이 궁현리 김용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피신한 이의 형인 김용립을 붙잡아 들여 동생의 행방을 취조한 것이다.

김용립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성고문까지 한 것이다. 이 날의 고문을 창고에서 숨죽이며 들었던 김기반(1922년생. 2015년 작고)은 생전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지서장이 김용립씨를 엄청나게 두드려 패고 고문을 했는데요. 김용립씨는 당시 40대 중반으로 지서장보다 20살이나 많았어요. 아버지뻘 이었지요"

진 지서장은 아버지뻘인 김용립을 왜 이렇게 무참하게 고문했을까? 김기반은 지서장이 "보도연맹원 중 소집에 응하지 않거나 도망가는 놈은 6촌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하며 김용립을 고문했다고 한다. 소집에 불응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창고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이 탈출할 엄두를 못 내게 위협한 것이다.

"여기 있으면 모두 죽소"

최근성 지서장은 "여기 있으면 모두 죽소. 얼릉 도망가시오"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지서 안으로 들어갔다. 지서 마당에 모였던 보도연맹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충북 제천군 한수면 보도연맹원들이 한 명도 죽지 않은 이유였다. '제천의 쉰들러'라 불릴 수 있는 최근성 지서장의 미담사례다. 글쓴이가 2년 동안 최근성 지서장의 친인척이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제천 한수면과 이웃면인 충주시 살미면의 노인들을 만나면 모두가 최근성 지서장의 선행을 기억했다.

최주환(94세. 충주시 교현동)옹은 "최근성 지서장 때문에 한수면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살아났지. 최근성씨는 일정 때 일본군으로 갔었는데, 언젠가 긴 칼을 차고 (충주 살미면)문화리에 왔었어"라고 한다. 최근성지서장은 강릉최씨로 충주 살미면 문화리 출신이었다. 해방 후 경찰계에 투신해 6.25당시에는 제천시 한수지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수면에서는 지서장 덕분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단 한 명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원군 강내면은 어땠을까?

강외면 보도연맹원 5명이 강내면으로 온 이유는?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기반
▲ 증언자 김기반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기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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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마다 구장들이 돌아다니며 "오늘은 특별교육이 있다고 하니, 한 사람도 빠지면 안돼요"라며 보도연맹원 소집을 재촉했다. 궁현리 김기반은 수시로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발걸음을 지서로 향했다. 1950년 7월 4일이었다. 지서유치장은 너무 비좁아 보도연맹원들을 면사무소 옆 창고에 구금했다. 70명 중 65명이 응했다. 5명은 눈치를 채고 피신한 것이다. 이 때부터 지옥생활은 시작됐다. 한 여름 날씨에 비좁은 창고에 65명이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지서장이 가족들에게 밥을 갖고 오라고 해서 가족들이 밥을 지어 창고로 갔다. 윤준구의 아내 허점순(1916년생. 2011년 작고)도 사곡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시어머니와 함께 밥을 해 날랐다. 구금된 보도연맹원 가족들이 밥을 열심히 해 날랐지만, 창고에 있는 사람들은 구금된 지 3~4일 후부터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창고 안은 가마솥과 다름없었다. 실내 공기는 절절 끓었다. 김기반씨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어요. 하루는 창고 문을 조금만 열어 달라고 아우성을 쳐, 순경이 조금 열어주기도 했어요"라고 한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생리현상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김기반의 증언은 이어진다. "석유 드럼통을 반 잘라 소·대변을 해결했어요" 이런 이유로 창고 안 공기는 최악이었다. 65명의 땀내와 소·대변 악취가 겹쳐지면서 제대로 숨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갇혀 지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숨 막히는 공간에 5명이 추가로 들어왔다.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토끼 눈을 하고는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라고 하니 강외면 보도연맹원들이라고 한다. 강외면 보도연맹원들이 강내면으로 와 창고에 구금된 이유는 뭘까?

전쟁 발발 후 강외지서장 권돈이 보도연맹원 35명을 소집해 지서창고에 가두었다. 지서장은 며칠 후 창고 문을 열어주며 "가라"고 했다. 구금되었던 이 중 30명은 집으로 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그런데 5명은 '청주경찰서'로 가라는 줄로 알고 청주 방향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강내지서 순경이 "당신들 뭐하는 사람이오"하니 걷던 이들이 사연을 했다. 강내지서장이 "이 놈들도 창고 안에 가둬"하고 해서 뜬금없이 강외면 보도연맹원들이 강내면사무소 창고에 갇히게 된 것이다. 강내·강외지역 보도연맹원들은 학살 하루 전 면사무소 창고에서 의용소방서 창고로 이송되었다. 이들이 강내면 탑연리에서 학살되기 하루 전 김기반은 용케 탈출했다.

탑연리에서 68명이 숨져

강내면 마을별 피해실태
 강내면 마을별 피해실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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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구장들이 온 동네를 다니며 외쳤다. "방공호 파니께 남자들은 모두 아침 먹고 지서로 모이시오" 전쟁 통에도 부역을 나가려니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안 갈 수도 없는 일이다. 강내면 청·장년들은 입이 삐죽 나왔지만 모두 지서 마당 앞으로 집결했다. 진 지서장이 "오늘은 방공호를 파니 모두 협조하시오"라며 탑연리 야산으로 인솔해갔다. 오전 내내 방공호를 파고 주민들을 돌려보냈다. 주민들이 판 방공호 자리에 잠시 후 보도연맹원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두 명씩 삐삐선으로 묶여 있었다.

2사단 16연대 군인들이 방공호 앞에 일렬 횡대로 서 있었고 강내 지서 순경 한 명이 군인들 옆에 뻘줌히 서 있었다. 군인 상급자가 부하들에게 보도연맹원들을 열 명 씩 세울 것을 지시했다. 방공호 앞에 선 보도연맹원들은 얼굴이 샛노랗게 변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총성이 울렸다. "탕탕탕" 맨 앞 열에 있던 사람들이 쓰러져 방공호로 떨어졌다.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 주민들이 판 땅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군인들의 총부리는 다음 열에 있는 이들을 향했다. 70명이 채 안 되는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학살 현장에서 강외면 윤형백이 천신만고로 살아났다. 결국, 강내면사무소 창고에 갇혔던 70명 중 68명이 학살당한 것이다.

1950년대 민선면장을 역임한 두 지서장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2년 지방선거가 처음 치러졌다. 이때는 현재와는 달리 읍·면장도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았다. 그런데 이때 전 강내지서장 진 선무와 한수지서장 최근성이 면장으로 선출되었다. 최근성은 6.25때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것이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면장에 추대되어 1959년 4월부터 1년간 면장에 재직했다.

진선무 지서장은 강내지서장 재직당시의 행위가 고향인 괴산군 사리면에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진선무는 1953년 9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사리면장에 재직했다.

6.25 당시 두 지서장의 다른 선택은 1950년대에는 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지난 지 67년이 지난 현재 두 지서장의 다른 선택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태그:#두 지서장, #지방선거, #성고문, #탑연리, #뻰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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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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