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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페이스북 페이지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가 페이스북 코리아에 의해 통보 없이 삭제되었고 1141명의 연서명을 받아 복구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알려지며 사건을 다룬 기사들에는 성판매 이슈에 대한 반감과 몰이해에 기반한 성판매자/성노동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기획을 통해 각 필자는 당시 달린 악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하나씩 답변합니다. -기자말

4편 '불쌍한 성판매 여성만 인정'? 그런 단죄를 거부한다

 70년대 유행한 소설과 같은 이름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87 (1987).
 70년대 유행한 소설과 같은 이름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87 (1987).
ⓒ 이학도(영화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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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페이지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에 달린 악플은 수없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윤리적 비난은 한 가지 형태만을 띠고 있지 않았다. 타자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주체들의 비난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창녀'들과 달리 '노력하는 자'로서 자신을 윤리적 상위에 놓은 사람들이었다.

"징징거린다"
"다들 힘든데 너만 힘드냐?"

문득 어느 소설을 떠올렸다. 1970년대에 유행했던 인기 소설이 있었다. 주인공은 시골에서 올라와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청순'하고 '순진'한 '처녀'다. 처녀는 겁탈을 당하고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되자 공순이, 버스 안내양을 거쳐 한쪽 팔까지 잃은 채로 마침내는 '창녀'가 된다.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가지고 온 성노동자에 대한 아주 전형적이며 기본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 폭력에 철두철미하게 수탈당한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는 영자를 '창녀'라고 비난하는 대신 가엾게 여길 수 있다.

영자는 가난했기 때문에 불행을 겹쳐 당해야만 했고, 심지어 장애까지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그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지 않으면' 성노동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노동에 대해 비난하는 가장 흔한 논리는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충분히 비참했느냐'는 질문이다. 성을 판매하는 것은 비참이 깊어서 생존이 경각에 달리지 않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윤리적 타락이다.

물론 충분히 가난했다는 게 증명된다고 해서 성노동이 위계 없는 노동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한쪽 팔이 없는 영자에게 '내가 속았다'며 화대를 도로 내놓으라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의 모습에선 윤리적 비난과는 다른 층위의 성적 기호가 강력하게 읽힌다.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은 가장 착취당하는 나약한 존재기 때문에 그 나약함 자체가 성애의 기호로 등장한다. '여기까지 오게 된 힘든 사연'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구매자들의 태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진심으로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창녀'에 대한 수많은 서사, 또는 가여운 '창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비일상적인 연애 서사들이 이 기호를 근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힘겨운 육체노동 끝에 결국 다다르는 자기 삶에 대한 학대와 방치에 남성 빈곤의 사회적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여성 빈곤은 자기 자신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자원화 하는 데에 사회적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서로 다른 빈곤의 위계가 발생한다. 이것은 빈곤한 이들의 노동이 가지는 위계기도 하다.

성을 사는 '가난한 막노동꾼' 남성과 성을 파는 '가난한 창녀' 여성의 조합은 근현대 한국 문학에서 얼마든지 발견해 낼 수 있다. 서사 속에서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경멸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여성의 심정이 드러나는 문학은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이나 이연주의 <매음녀 연작> 정도를 제한다면 흔하지 않다. 이런 글들에서 대체로 여성은 자기 고통의 근원이 되는 남성을 증오한다.

노동이 될 수 없는 노동, 성노동

사회가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에는 윤리적 낙인을 비롯한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나, 그 중심에는 성을 판매하는 여성이 '노동'을 한다고 여기지 않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노동이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나, 성을 판매하는 여성은 노동력이 아니라 자신이 '타고 태어난' 것, 즉 여성의 성기를 판매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정의를 돌아보자면, 노동이란 "자연을 변화시켜 인간의 삶에 필요한 방식으로 만드는 행위"다. 물론 이런 차원에서는 성노동은 결코 노동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미 자본주의는 인간과 인간 간의 다양한 관계를 임금을 매개로 노동으로 치환해 버렸다.

그렇기에 백화점 앞에 서서 "어서 오십시오, OO백화점입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가치는 그의 존재에 투영되어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그는 실제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형태로 사람들과 기업의 관계를 매개하고 그의 노동은 기업의 이윤에 복무한다. 물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러나 그 역시 "어서 오십시오" 라는 말을 아무런 노력 없이 하도록 타고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직여서 그 말을 해야 하고, 그 말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물론 성노동자들도 중노동에 가까울만큼 몸을 움직이고, 심지어는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성노동은 결코 노동일 수 없다고 특별한 위계를 부여하는 이유는 성 그 자체가 자원으로서 최종목적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관념이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관념은 여성의 신체와 성이 소유할 수 있는 자원임과 동시에 교환가치가 되어 온 역사 위에 서 있다.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증여받아야 하는 존재가 '여성'이라고 전제한다면, 많은 남성들에게는 '자원으로서의 여성'을 획득하느냐가 사회적 필수조건이 된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남성들에게 '여성과의 성관계를 획득하는 것'은 '삶'의 과정이나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다. 그리고 이 성적 자원에 대한 강력한 희구와 동시에 인간이 존재 자체로 임금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을 거래하는 시스템에서 여성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필연적으로 '판매'의 대상이 된다. 이 여성들이 판매의 대상이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이유가 여성이 힘겨운 노동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생래적 조건이 이미 자원이기 때문이므로 성노동은 설령 그것이 노동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성적 자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판매된다. 노동현장에서 남성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기를 기대 받는 것, 사회적 장식으로 취급받는 것, 서비스 직종 등에서 "핑크 워커"로 더 많이 일하게 되는 것, 어떤 위치에 있건 성적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먼저 재단당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성'이 자원으로 인지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자원화 된 몸'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의 분노   

그러나 여성의 '성'이 자원으로 인지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여성들이 '성노동자'로 취급받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양상을 띠고 있다.

여성의 '성'이 사회적 자원으로 취급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판매하는 여성은 강력한 비난에 처하게 된다. '정당한' 노동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생래적 자원'을 판매해서 삶을 영위하겠다는 것은 성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정하지 못하다는 감각을 환기시킨다.

남성은 그 성적 자원이 바로 자신이 열망하는 것이기에 질투와 분노를 표출하고("나도 여자로 태어났으면 성매매라도 할텐데", "여자들은 수 틀리면 몸이라도 팔 수 있잖아") 여성은 같은 생래적 조건이 어떤 형태로 자원화 되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을 자신과 달리 판매한다는 사실에 대해 비윤리적이라고 분개한다("같은 여자로서 부끄럽다, 어떻게 저러고 사냐", "더러운 창년들").

생래적으로 자원이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그 자원을 판매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갖는다. '창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비가시화된 사람들이기를 요구받았다. 전면에 나서는 순간 사회는 이들을 '존재해서는 안 될 자'로 비난했고, 다시 게토화된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다.

물론 이 여성들이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으나, 이는 온전한 공적 공간이기보다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경계가 흐려진 공간이었다. 예술인들의 일탈이 허용되는 남성 중심의 사교계 같은 공간에서는 이들의 생래적 자원도 하나의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성들의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따로 위치한다는 것이 공적으로마저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가정을 이끄는 남성권력'이 전폭적으로 인정받던 시대가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자 성적 자원을 판매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더욱 뚜렷하게 가시화되었다. '꽃뱀'이나 '골드 디거'와 같은 표현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더욱 자주 사용되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된장녀', '김치녀'와 같이 자국 여성들이 성적 자원을 통해 이득을 얻는 것에 대한 비난 표현도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성노동에는 언제나 높은 수당이 지불되어 왔다. 사회는 성적 자원을 강력하게 희구하며,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득적인 권력을 가지는 것이 어려워진 남성들은, 문화적으로 교환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생래적 자원이 되어버린 여성들의 신체를 선망하면서 동시에 질투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여성이라는 자원을 소유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자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빈곤에 내몰려 성노동을 시작한 게 아닌 이상에야, 그것은 노동으로 승인될 수 없었다. 몸 팔아서 사치하고, 상징 자본인 명품백을 사려고 사회적 윤리를 격하시키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자발적 성판매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 지점에서 촉발된다.

'지가 돈 많이 벌려고 몸 판 거면서 징징대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딨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몸 파는 일 선택한 건 너잖아'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에 달린 성노동에 대한 수많은 윤리적 비난 속에서 이런 비난의 목소리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페이지에서 글쓴이는 성노동이 어떤 형태로 성적 착취를 하는지, 인격을 유린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했다. 성노동에 덧씌워진 윤리적 낙인과 성노동이라는 노동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어떤 노동도 성노동만큼 날것의 형태로 이런 착취가 벌어질 수 없음이 명백함에도 이들은 자발적 선택과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없음'을 주장한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삶이 힘듦'을 설파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고통에 무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토록 윤리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려고 하는 나의 삶도 힘든데 어째서 너의 '생래적 자원' 팔기까지 이해해 주어야 하느냐는 분노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윤리적 그늘에 기생하고 있으면서 공감과 이해까지 얻으려고 하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윤리적 비난을 넘어서는 성노동자들에 대한 이 분노는 노력하지 않은 기간제 교사들을 정규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교대생들의 분노와도 일면 맞닿아 있다.

타인을 끌어내려 '공정함'을 얻으려는 사람들

이들의 세계인식에서 '동병상련'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같은 빈곤과 같은 불안정한 노동 위에 서 있다고 할지언정 성노동자는 이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실존도 이미 불안정하지만, 그 불안정을 뚫고 자신은 성노동 같은 '편법'으로 빠지지 않고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패와 불안정은 오롯이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고통스러운 몫인데, 부당하게 '생래적 자원'을 판매해서 먹고 사는 '창년'들이 자신도 불쌍하다고 내 옆을 치고 들어오려고 한다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를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위치로 끌어올리거나 끌어올려주길 요청하는 대신 더욱 거세게 서로의 바닥을 깨부순다. 성노동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돈 때문에 온갖 모욕에도 무람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존재하는데 어찌 성노동자가 '그 돈을 받으면서' 안전과 명예까지 챙기고 싶어 한단 말인가. 서로의 바닥을 다 깨부숴서라도 공정하고 싶은 사람들의 감각에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기로 결정한 이상 '명품백 사려고 몸 파는 년들'이라고 편견을 입에 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 그들이 성노동이라는 형태의 일을 시작했는지 굳이 이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바닥을 무너뜨려야만 공정함이 실현된다고 믿는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개인이 능력이 있는지, 개인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얼마나 개인이 노력을 했는지다. 그렇기에 성노동자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을 때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반응한다.

성노동자들은 남들만큼 노력도 하지 않고, 기껏해야 타고 태어난 자기 '성기'나 파는 주제에, 그것조차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포지셔닝된다. 이미 사회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사회의 구성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의 안전망을 요청할 수 없는 가운데 "사회적 그늘"을 선택한 사람들은 "공동체 밖으로 나가기"를 선택한 사람들로 규정된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솔 C. 지겔(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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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마릴린 먼로가 연기한 쇼걸 로렐라이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기반 삼아 백만장자를 유혹해 안정적 삶을 영위하려고 하는 '된장녀'다. 1953년작인 이 영화는 '된장녀'의 존재를 결코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 속 로렐라이는 돈을 밝히지만 그 결과 남자를 무너뜨릴만큼 돈을 밝히진 않는다. 남자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 남자를 파멸시키는 대신 성공한 남자에게 적당히 기생해서 살기를 기대한다.

그는 남자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길 기대하며, 남성들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자들에게 자신이 그녀보다 더 우월하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로렐라이를 나름대로 삶의 철학을 가진 사랑스러운 존재로 그려낸다.

로렐라이가 용인될 수 있었던 시대는 나의 돈을 노리고 다가오는 사랑스러운 여자 하나쯤은 너그럽게 넘겨 볼 수 있었던, 아직 멸망하지 않은 가부장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여성의 성적 가치가 돈으로 치환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며, 여성이 "나는 사회에서 주어지는 게 많지 않은 '여자'기 때문에,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다이아몬드"라고 노래해도 웃어넘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더 이상 로렐라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여성의 성은 여전히 교환가치를 가지는 자원이고 심지어 남성에게는 가져야만 할 중요한 자원이지만, 남성들은 더 이상 독점적으로 물질적 자원과 성적 자원을 점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성적 자원을 판매하는 여성들을 비난하게 되었다. 물질은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생존의 조건은 더욱 첨예해졌다. 하루를 살아남는 것이 공평하고 공정하게도 다함께 버거워진 사람들은 이제 성노동자의 고통에 자를 가져다 댄다. 인신매매를 당했는가? 자발적 성매매인가? 가난한가? 얼마나 가난한가? 끼니를 못 때울 정도인가? 다른 일들은 힘들지 않은가? 충분히 '징징댈만'한가?

성노동은 '생래적 자원'을 판매한다는 특수한 사회적 인지에 기반해 있기에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동시에 성노동을 질시하는 사회적 시선은 생존의 조건이 충분치 못한 노동계급 일반의 분열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성노동의 독특한 특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성노동자가 선 자리를 두드려 부수면서도 성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성적 자원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희구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편법'의 세계가 아니라 '정공법'의 세계, '노오력'의 세계로 돌아온다고 해도 여성의 성이 사회적 자원으로 취급받는 양상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수많은 질문에 답하려면, 그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

성매매를 범죄로 취급한 결과, 우리 사회는 여성의 성이 어떤 형태로 자원화되는지 돌아볼 기회를 잃었다. 여전히 여성의 성은 교환 가치고, 사회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성의 성을 매개로 부를 확장한다.

성노동은 그것이 여성에게 주어진 생래적 자원이라는 사실과 함께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낙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성적 빈곤에 연결된다. 여성의 삶이 곤고해질수록 자본주의는 여성의 성애를 더욱 뻔뻔스럽게 자원화 한다. 그것은 '자발적 성매매', '선택' 같은 언어로 드러나며 때로는 명품백을 들고 논현동에 살면서 사치를 누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성매매를 범죄로 취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적 자원이 된 여성'이 바로 그 맥락에 서서 하는 노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사회가 여성의 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여성이 사회 공동체에서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노동과 비범죄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성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성의 성을 교환가치로 만든 사회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네가 선택한 것이니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수사는 그 자체로 사회와 공동체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어떤 곤고한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자원'을 판매하는 노동으로 나아가는가. 왜 여성적 빈곤은 쉽사리 여성들의 '성적 자원'을 착취하는가. 왜 사회는 여성의 성을 교환가치로 몰아넣고서 곤고한 여성에게 생래적 자원조차도 판매하지 못하도록 낙인을 덮어씌우는가. '자발적 막노동'과 '자발적 성노동'은 어떻게 다르며, 왜 다르게 취급받는가. '자발적 성노동'은 어느 수준까지 그 자발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왜 성노동은 '선택'과 '자발'이라는 이름하에 공동체의 연대의식 밖으로 몰려나야만 하는가.

이 질문들에 올바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노동자들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공동체의 일부라는 점이다. '선택'과 '자발성'을 이유로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외면해도 될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어야만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의 안전망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책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https://www.tumblbug.com/keepspeaki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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