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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엄니산소에서
 작년 여름, 엄니산소에서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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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엄니가 돌아가시기 꼭 일 년 전, 가족회의가 열렸다. 백수를 바라보는 연세에 다리가 불편한 것 말고는 별다른 병도 없으셨던 엄니다. 다만 당신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되었고 화장실 출입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했다.

엄니가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엉덩이 근처에 욕창도 생겼다. 누군가 엄니 옆을 지키며 돌봐드려야 할 손길이 필요했다. 가족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형제들이 모였다. 여러 논의 끝에 요양병원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엄니는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충격과 배신으로 무척 당황하셨다.

"나를 요양원에 보낸다구? 니들이 날 버리려는구나!"

엄니는 아파트 생활을 하기 전에 주택에서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었다. 그 공간에서 온갖 푸성귀를 키우며 평생 농사로 단련된 부지런함을 실천하셨다. 때가 되면 형제들은 엄니를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졌다. 엄니가 싸주신 상추나 고추, 호박이나 깻잎 등이 돌아가는 손에 한 봉지씩 들려 있었고 엄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엄니가 사는 동네 근처 대학 주변의 오래된 주택들은 시나브로 없어졌다. 골목길 구멍가게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오며가며 동네 이정표기 되었던 느티나무도 사라졌다.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그곳엔 아래위로 칸칸이 반듯하고 깔끔한 창문이 달린 빌라가 들어섰다.

엄니가 계신 집은 길 안쪽으로 쭉 들어와 있었다. '설마, 이곳까지'라고 생각했지만 근처 집이 팔리고 이웃해 있던 집이 없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휑하던 곳에 3, 4층 빌라가 올라가자 아담하고 텃밭이 있던 엄니네 집은 해를 가리고 칙칙한 그늘에 놓였다. 이웃 간에 정을 나누던 사람들은 값을 쳐주는 업자에게 집을 팔고 다른 도시로 떠나거나 아파트로 스며들었다.

엄니가 경로당에 다니시면서 친구 분들로부터 들어왔던 '아파트'라는 데는 노인네들이 한 번 들어가면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친구가 아파트로 들어가더니 바깥 출입을 못해서 누가 데려다주고 데려오지 않으면 길을 못 찾아. 다 똑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한때 빌라는 새로운 주거형태가 되었다. 대학교 근처 빌라들이 학생들의 기숙과 생활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은 속속 빌라로 스며들고 아파트는 빌라 저만치에서 고층으로 쑥쑥 올라갔다. 엄니도 결국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다시 형제들이 모였다. 요양원을 한사코 거부하는 엄니를 보낼 수는 없었다. 엄니에게 요양원은 쓸모없어진 노인들이 버려지는 고려장 이상일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그런 엄니를 온전히 모셔야 한다면 누구 한 사람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엄니 옆에 있어야 했다.

"엄니는 내가 모실게~"

(작은시누)형님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던 형님이 결단을 한 것이다. 형제들이 다시 머리를 맞댔다. 형님 혼자 엄니를 감당하기엔 형님네 형편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논의 끝에 의견이 나왔다.

형님이 받는 월급만큼을 형제들이 같이 모아 해주자는 것, 또 엄니를 주중에 종일 모시니 주말에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엄니를 돌봐드리는 것이다. 그래야 형님도 엄니에게서 잠시 벗어나 바깥 공기로 환기를 시키고 쉬는 짬을 가질 수 있으니까.

"자식 된 도리로 엄니를 모시는 건 당연한데, 내가 돈을 받고 모시게 되어서 올케한테 미안하네. 동생네 살림살이를 뻔히 아는데..."

어느 날,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형님이 엄니를 돌봐드리니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거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 마음이 어디 나뿐이었을까. 서울에 있는 큰아들 외에 세 형제가 대전에 있으니 엄니 몸이 온전하실 때는 자주 못 가던 세 아들네 집을 한 달이면 모두 들여다보게 된 셈이다.

엄니가 우리 집에 오신 어느 금요일, 저녁을 먹고 남편과 나는 엄니가 누워 계시는 작은 방에서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웃기도 하고 주전부리로 양파링을 먹기도 했다. 양파링은 엄니가 입에 넣고 녹여 드시는 유일한 과자였다.

"니들 행복하게 살고 있지?"
"그럼요, 이렇게 맛좋은 양파링도 먹고 티비도 보고 행복하죠!"
"그려~, 그럼 됐어."

엄니가 뜬금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과 내게 물으셨다. 엄니는 행복이란 말로 어떤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엄니가 의미하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식구들이 둘러앉아 쑥국을 먹으며 봄이 왔다고, 햇살이 따스해졌다고 얘기를 나누는 밥상, 비오는 날에 김치부침개를 부치며 막걸리 잔을 돌리는 것, 누군가의 생일이면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콩가루 섞은 칼국수를 후후 불어가며 호로록 면발을 빨아올리며 먹는 것... 엄니가 말씀하신 '행복'에는 먹을거리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아들 손자며느리가 다 모인 자리 가운데에는 아기처럼 가장 조그맣고 연약하신 엄니가 언제나 계셨다. 맛있게 너도 먹고 나도 먹는 그 모습을 보는 엄니의 얼굴에는 항상 함박웃음이 넘쳤다. 그 웃음의 힘이 떨어져 사는 형제자매를 모이게 했다. 때마다 모이는 식구들은 언제나 스물이 넘었다. 엄니의 함박웃음은 힘이 셌다. 그런 엄니가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나 또 올껴~."

엄니가 집으로 가실 때 집에 가서 드신다고 남은 양파링을 챙기셨다. 차를 타고 떠나기 전, 차창유리를 내리며 엄니가 손을 흔들며 어린아이처럼 말씀하셨다.

"네, 엄니 또 오셔요~."

엄니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다음 주엔 막내네 집으로 가시겠구나' 생각했다. 그 다음주, 보름 후에는 당연히 우리 집에 오실 거라고 여기면서. 그 이튿날인 2015년 4월 어느날, 엄니는 바쁜 듯 소천하셨다. 따스한 봄기운이 퍼지는 즈음이었다. 엄니는 우리가 결혼하기 직전 돌아가신 시아버님과 합장되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날씨는 연일 한파를 예보한다. 봄을 기다리며 엄니가 물으셨던 '행복'의 의미를 다시 헤아려본다.


태그:#요양원, #부모, #100세시대, #고령화시대,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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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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