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영자는 뒷걸음질을 친다. 겁에 질린 영자에게 남자는 점점 더 보폭을 넓혀 다가온다. 작은 방 구석에 발꿈치가 닿자 영자는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  그리고 그 날. 스무 살 남짓한 영자의 인생은 그녀의 작은 발 아래로 추락한다. 

1975년 개봉한 <영자의 전성시대>는 시골에서 올라와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영자가 일하던 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여공, 버스 차장 등을 전전하다가 환락가의 작부로 추락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는다. 당시 엄청난 흥행몰이로 한국영화사에서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지만,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강간의 묘사다. 당시 검열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강간이라는 소재의 선택 자체도 놀라운 데다가 영화는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이를 묘사한다.

예를 들어, 영자가 주인집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부분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내려다보는 로우 앵글의 시점 쇼트(POV: point of view)로 디테일 하게 묘사된다. 이 시퀀스에 대해서 두 가지 지적 또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시퀀스가 택하는 '문제적' 시점이다. 2분가량의 강간 시퀀스는 가해자의 시점 안에 가두어진 프레임 안에서의 영자의 클로즈업과 남자가 영자에게 하는 행위를 옆에서 관찰 하는 시선으로 채워진다. 문제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강간의 묘사가 오롯이 가해자의 시선과 강간을 지켜보는 3인칭의 시선 그리고 피해자의 분열된 육체의 클로즈업으로만 채워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가해자와 이를 지켜보는 시선, 즉 (관음증적) 쾌락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이는 재현이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한 장면

<영자의 전성시대>의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두 번째 해석은 '효과'에 기반을 둔다. 이토록 가학적, 혹은 사실적 재현으로 영자가 겪었을 고통을 가능한 한 가까이(클로즈 업), 사실적으로(로우 앵글, 시점 쇼트) 전달하려는 창작자의 의도 역시 고려해 볼 수 있다. 영화를 만든 김호선 감독은 '강간'을 비롯해 영자가 겪은 다른 폭력 묘사에 있어서 1970년대의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정권과 시대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김효정 논문, Whoring the Mermaid: The Study of South Korean Hostess Films (1974-1982) 참조). 

사실상 <영자의 전성시대> <화녀>를 포함한 70년대 한국영화들에는 '강간의 홍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간이 빈번히 소재로 사용되었다. 80년대 초반까지 박스오피스 전반을 지배했던 호스티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들이 강간을 당해 순결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강간의 묘사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폭력의 은유나 사실적 표현에 기반을 둔다 해도 공통된 경향, 즉 가학적이거나, 볼거리에 치중한 재현 모드가 강간을 묘사하는 하나의 작법으로 관습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강간 묘사의 경향은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작년에 이슈몰이를 했던 <브이아이피>의 가장 큰 문제는 범죄의 야만성을 표현하는데 있어 사용되는 재현 모드가 사실성, 혹은 그 폐해를 전달하려는 공정성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닌 과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윤간 시퀀스에서 범인(들)은 강간을 한 여성의 목에 얇은 철사를 두른다. 철사가 둘러지면 카메라는 여성의 핏줄이 하나씩 붉어져 나오고 눈알에 핏대가 서는 과정을 가해자의 시점에서 클로즈업으로 잡아 점진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시퀀스에서 압력으로 인해 목과 안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해부학적으로 섬세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범죄의 묘사를 시각적으로 확대하고 '관전 효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해자의 폭력성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는 박훈정 감독의 답변은 모순이다.

물론 적법한 절차를 거쳐 등급을 받아 상영이 된 작품이기에 궁극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간뿐 아니라 살인, 유괴 등 범죄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더더욱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박 감독은 후에 "젠더 감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라고 언급했지만 <브이아이피>의 강간 묘사는 비단 젠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범죄를 재현함에 있어 동일하게 중추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은 범죄의 피해자들이다. 시각적 묘사의 '파격효과(shock effect)'에 방점을 두는 것은, 그렇기에 위법은 아닐지언정 비윤리적이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앞으로도 수많은 영화들에서 강간이 소재로 쓰일 것이고 그래야 할 당위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강간묘사의 재현 방법에 있어서도 다양한 경우가 혼재할 것이다. 다만 이에 있어 여러 입장을 고려하는 시간과 고민이 필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7년, 일본의 니카츠 스튜디오는 지난 1960, 1970년대에 불황을 이기고자 고안했던 로망포르노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강간을 포함한 여성 캐릭터들에 행해진 폭력에 대해 '참회'하는 의미로 여성을 위한 로망포르노 리부트를 만들었다. 수 백 편의 로망포르노 영화들을 통해 이미 장르적 관습이 된 강간묘사가 리부트 프로젝트의 다섯 편으로 개혁될 수 없겠으나 니카츠 스튜디오의 기획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문화적 참회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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