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백수가 된 지 한 달, 해가 쨍쨍한 오전 11시 나는 컵에 위스키를 가득 부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술을 즐겼고, 이제 시간도 많으니 한 잔 정도 마시고 외출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퇴직은 다소 씁쓸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출근 도장을 찍듯 카페를 방문해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글도 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 생활도 지겹게 느껴졌다. 쓸 이야기도 떨어졌고 커피숍의 의자는 오래 앉아 있기에 너무도 불편했다. 그렇다면 뭘 해야할까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회사, 글 혹은 책, 하루를 마무리하는 술, 그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미 써먹었으니 남은 옵션은 음주 뿐이었다.

오늘만 딱 한 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눈을 뜨고, 아침을 먹고, 집을 정리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술을 따랐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술에 취해 언제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면 해가 져있기를 반복했다. 내일은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막상 다음 날이면 '조금만 마시면 될거야'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일이 터졌다. 중요한 약속이 있던 날, 나는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골아 떨어졌고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남겨 두고서야 일어났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지각을 면하기 어려웠다. 머리는 감지도 않고 고양이 세수만 한 채로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뒤늦게 도착해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숙취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어."

왜 나는 낮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나

 영화 < 28일 후>

영화 < 28일 후>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돌이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술에 의존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퇴사 통보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회사의 사정을 알았기에 그 결정이 납득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뒤끝도 없었고 마무리도 깔끔했다. 그래서 심란함도 별로 없었고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술병을 끼고 살던 때가 있긴 했지만 그건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문제가 해결된 지는 몇 년이 흘렀다. 어쩌면 '조절할 수 있다'는 자만감이 사태의 원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술에 손을 댄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우울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감정이 요동치거나 깊은 실의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권태로웠다면 모를까.

증상의 원인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을 찾으면 좋다. 그게 어렵다면 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나 영화를 봐도 괜찮다. 그 당시 내가 떠올린 건 산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 28일 동안>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주인공이 해맑게 웃는 포스터를 보면 가벼운 코미디 영화 같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인 그웬 커밍스(산드라 블록)는 바와 파티를 전전하며 그야말로 흥청망청한 세월을 보내는 알코올중독자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삶이 방탕할지라도 불행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웬은 술에 취해 언니 릴리(엘리자베스 퍼킨스)의 결혼식을 망치고 웨딩카를 몰다 가정집을 들이받는 사고를 치고만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그녀는 28일 동안의 재활원 생활을 명령 받는다.

맑은 정신으로 살기란 얼마나 힘든가

 영화 < 28일 후>

영화 < 28일 후>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 28일 동안>에는 역시나 한때 중독자였던 재활원의 레지던트 코넬(스티브 부세미)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입소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처음에 나는 그것이 금단 현상이 주는 끔찍함에 대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 그웬의 룸메이트 안드레아는 퇴소를 앞두고 다시 정신병원에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자해를 한 후 이렇게 말한다. "잊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나는 맨정신으로 내가 처한 현실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회사일과 원고 쓰기를 오가며 쳇바퀴 굴리듯 바쁘게 살다 하루 아침에 한량이 되어버린 현실을. 이제는 소속을 묻는 질문에 '무직'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을. 하루하루 눈 앞에 놓인 긴 여유 시간은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님을 명징하게 알려주었다.

술을 마시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몽롱한 기분이 들면 그런 상황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고, 감정이 고양되고, 흥분이 넘쳐 흘렀다. 결국에는 이불에 코를 처박은 채 눈을 뜨리란 걸 알았지만, 땅에서 발을 떼고 하늘을 오르는 그 기분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나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 28일 동안>의 주인공 그웬도 마찬가지다. 일견 자유분방하고 흥이 넘치는 삶을 살던 그녀도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 깊은 고독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웬의 엄마는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알코올 중독이었고 딸들이 어렸을 때 세상을 뜨고 만다. 언니인 릴리는 그웬이 자신의 엄마처럼 행동할 때마다 냉정하게 굴고 결국 그녀를 외면하기에 이른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준 적이 없으니 그웬은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는 어른이 되고, 오직 술과 파티가 주는 도취만이 유일한 의미를 지닌 냉소적인 삶을 유지해간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 아닌 삶을 향해

 영화 < 28일 후>

영화 < 28일 후>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하지만 영화 속 코넬의 말처럼 그것은 삶이 아니다. 단지 죽음에 이르는 길일 뿐이다. 결국 그웬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문제의 근원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일을 해야했다. < 28일 동안>에는 재활 치료의 과정으로 말의 다리를 들어 편자를 확인하는 수업이 등장한다. 말은 자신을 만지는 사람과 교감하지 않으면 결코 다리를 들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렇게 말을 다루듯 세상을 대해야 한다. 고루한 이야기 같지만 이 대사는 중독의 핵심을 찌른다. 도망가서는 안된다. 내 몸이 마주한 현실에서 억지로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 공간에 마음도 맑은 정신도 함께 있어야 한다. 허무하면 허무한대로, 씁쓸하면 씁쓸한대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듯 재활원을 퇴소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안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한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이고 결과가 어떨지를 알게되고 나면 어쨌든 선택을 해야한다. 퇴직 이후 나는 일과 사람들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 감동과 흥분이 거의 대부분 사라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손으로 사라진 그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내야 했다. 막 눈을 뜬 어두운 방에서 이런 식의 막연함과 공허함을 마주하면 이를 단숨에 잠재울 것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창문의 커튼을 걷고 빛을 들이기로 결정했다. 방안의 사물이 명확히 보이도록, 내가 걷는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수 있도록. 사람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 하지만 베일을 쓴채 헤메이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넘어져 삶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낮에 술을 마시는 일을 그만두었다.

28일 동안 중독 알콜 중독 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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