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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여자의 명절’과 ‘남자의 명절’, ‘부부의 명절’ 기획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성평등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해 봅니다. 또한 ‘싱글의 명절’을 통해 가족 중심 명절에서 벗어나 조금 다르게 명절을 보내는 이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우리 추석 때 만날까?"

작년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고교 동창 친구 두 명과 카톡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나온 말이다. 우리 나이 어언 마흔여덟. 나야 처음부터 초지일관 싱글이었지만, 한 명은 돌싱, 다른 한 명은 유부녀였기에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다.

명절 때 친구들을 만난다는 게 까마득한 옛날일이 되어 버려서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명절이면 으레 다들 시댁, 친정을 다니느라 바쁜 친구들이 명절 때 만나자고 하니 낯설고 생소했다. 

"나 이 날 아르바이트 가니까 너희가 분당으로 와주면 안 돼?"

4년 전, 이혼하고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친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노 프라블럼."

마흔 넘어 결혼해서 여섯 살 된 아이를 둔 또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어라? 떠보는 게 아니었다. 얼른 "나도 좋아"하고 답을 썼다. 아주 오랜만에 명절이 기다려졌다.  

돌아온 친구들, 달라진 '명절 라이프'

 15년 아니 거의 20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보낸 명절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사진은 영화 <써니> 스틸컷)
 15년 아니 거의 20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보낸 명절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사진은 영화 <써니> 스틸컷)
ⓒ 토일렛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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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명절이 달갑지 않았다. 결혼한 친구들은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싫어했지만 싱글인 나는 좀 다른 이유였다. 물론 젊었을 때는 명절 연휴가 반가웠다. 간만에 푹 퍼져서 장판 디자이너가 되어 뒹굴거리는 것도 좋았고, 친구들과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할 일 많고 갈 곳 많고 만날 사람 많은 명절 연휴는 늘 손꼽아 기다리는 짧은 방학이었다. 적어도 30대 말까지는 그랬다.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면서 내 명절의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만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는 명절 안부를 주고받는 것조차 소원해졌다. 어쩔 수 없이 몇 년 동안은 조신하게 집에서 명절 연휴를 보냈지만,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는 어른들의 쏟아지는 결혼 질문 세례에 기가 질려서 작전을 바꾸었다.

혼자 산에 오르는가 하면, 혼자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점점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갈 무렵, 다행히 독립을 했고 그 이후로는 명절을 보내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그래도 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과연 이게 좋은 걸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 같다.

나름 싱글에 맞게 세팅된 명절 라이프를 흐트러뜨린 것이 바로 지난 추석이었다. 우리는 진짜 명절 다음날 저녁에 만났다.

"이게 얼마 만이니? 우리 이렇게 명절에 모여서 노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한 친구가 감격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15년 아니 거의 20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보낸 명절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술도 많이 마시고, 영화를 보고, 쇼핑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럴 만한 체력적 여력이 없다. 그날만 해도 저녁을 먹은 뒤, 카페에 가서 한 차례 수다를 떤 다음 3차로 공원 벤치에 앉아 밤바람을 맞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게 유흥의 전부였다.

대화의 주제도 달라졌다. 젊을 때는 연애 이야기, 직장 생활 이야기가 주였다면 이제는 치매 초기인 엄마 걱정,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의 상태, 돈 버는 일의 고단함 등등이다. 당연한 변화다. 유행가 가사처럼, 다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니면서 사느라 주름도, 한숨도, 걱정도 많아지고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안심이 되고,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가족의 상태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이제 돌싱 친구는 아이를 혼자 두어도 될 만큼 다 키웠고, 유부녀 친구도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휴 하룻밤 정도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이게 뭐라고 진짜 너~무 좋다"

 나이 들면 친구가 소중해지는 시간이 오겠지 하면서 우정을 지키며 기다리길 얼마나 잘했는지
 나이 들면 친구가 소중해지는 시간이 오겠지 하면서 우정을 지키며 기다리길 얼마나 잘했는지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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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긴 수다를 떨었는데, 시간이 늦어지길래 공연히 마음이 급해진 내가 "이제 집에 가야지"하면서 들려보낼라 치면 두 사람 모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족이 소중하지. 하지만 잠시나마 가족한테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있잖아. 그냥 내 친구들이랑만 놀고 싶을 때. 마음만 간절하지 실제로는 못하고 메어 살았는데, 이제 내가 누구 눈치 볼 나이도 아니고, 그동안 할 만큼 했고. 이 정도도 못하면 되겠니. 근데 이게 뭐라고 진짜 너~무 좋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음 명절에도 만날 것을 약속했다.  

명절을 지내고 몇 주가 지난 뒤였다. 엄마와 별 것 아닌 일로 다투고 집을 나와 버린 나는 명절에 만난 유부녀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울화를 토해냈다. 어느 정도 맞장구를 쳐 주던 친구는 저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면서 오라고 했다. 결혼한 친구의 집에 저녁 시간 때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다 이제 내 쪽에서도 좀 편해지자 싶어서 귤 한 봉지를 사들고 냉큼 갔다. 친구에게 시시콜콜 일러바치면서 저녁 한 끼를 얻어먹은 뒤 집으로 오는데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제든지 와. 밥 해 줄게."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하고 집에 가니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꽤 오래 통화한다 싶었는데 이야기 중간에 자꾸 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한 30분쯤 흘렀을까. 좀 이상하다 싶은 순간에 엄마가 내 유부녀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서야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를 알았다.

늘 수다가 고픈 엄마는 아주 오랜만에 안부 차 전화한 내 친구에게 당신 딸 험담을 신이 나서 쏟아내고 있었던 거다. 생각해 보니, 집 전화를 사용하던 때에는 친구네 집에 전화했다가 친구의 부모님과도 제법 안부를 나누곤 했는데, 핸드폰이 생기면서는 그럴 일이 줄어들었다. 나한테 소식을 전해 듣기만 하다가 간만에 친구와 통화하니 엄청 반갑고 좋으셨던 모양이다. 베란다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소곤거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깔깔거렸다.

"내 욕 실컷 하고 스트레스 좀 풀렸어?"

친구와 통화를 끝낸 엄마에게 물었다.

"웅. 속이 다 시원하네."

엄마는 보름달처럼 환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너한테 구박받고 의기소침하실까봐 같이 너 욕 해드렸어."

친구는 명절 때 가족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엄마가 궁금하던 차에, 내가 엄마와 싸운 이야기를 듣고는 겸사겸사 전화드려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 욕을 30분이나 하다니. 하지만 푸짐하게 욕을 먹어도 유쾌하기만 한 배신이었다. 고마웠다. 나도 이번 명절에는 친구네 부모님 댁으로 과일을 보내드리면서 간만에 명절 인사를 드리려 한다.   

분명 우리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서 다시 찾아온 명절의 풍경은 그 변하지 않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명절 라이프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나이 들면 친구가 소중해지는 시간이 오겠지 하면서 우정을 지키며 기다리길 얼마나 잘했는지. 명절이 기다려지는 건 또 얼마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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