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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본다. [편집자말]
"당시 이윤을 추구하는 도시의 상인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중략) 그런데 왜 피렌체 상인들이 수도원을 신축 또는 확장하는 데 필요한 벽돌이나 목재의 구입 비용, 수도원 내부를 장식할 고가의 그림이나 조각품을 제작하는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한 것일까?"(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21쪽)

피렌체를 여행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래전부터 가톨릭은 고리대금업을 죄악시했다. 이율을 떠나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었다. 그래서 은행업자들은 모두 고리대금업의 죄를 짓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피렌체의 여러 부자들은 교회에서 '불법'으로 규정하는 은행업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새로운 인문주의가 나타난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종교가 생활과 사고방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는데 말이다.

피렌체 대성당 앞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로서 피렌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여기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당 안에는 도나텔로가 제작한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무덤이 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1360 ~1429)는 오랜 기간 요하네스 23세와 친분을 쌓아왔다. 불행히도 요하네스 23세는 훗날 폐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때, 조반니가 대신 보석금을 내주고 피렌체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이 일은 수십 년간 이어온 두 사람의 두터운 우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순수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메디치 은행은 원래 조반니의 삼촌이 로마에서 운영하던 것이다. 조반니는 이 은행을 1395년에 인수했고, 1397년에 피렌체로 본점을 옮겼다. 금융업 길드의 회장직에 올랐던 1402년, 야심만만한 발다사레(Baldassare Cossa) 주교에게 1만 베네치아 금화(약 80억원)를 빌려준다. 일종의 정치헌금이다. 조반니는 주교의 모자를 담보로 잡았는데, 그냥 모자가 아니라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조반니의 자금을 발판으로 이 주교는 추기경을 거쳐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되었다. 교황은 자신을 도와준 조반니에게 교황청의 자금 운영권을 넘겨준다. 전세계에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니 그 수익도 어마어마했다. 여기서 얻는 이익금 중 일부는 비밀장부에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교황에게 넘어갔고, 메디치 은행은 급성장하게 된다.

폐위 당한 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요하네스 23세를 계속 보살펴 준 것은 미래를 위한 조반니의 투자였다. 조반니가 요하네스 23세와의 신의를 계속 지키자, 사람들은 조반니를 믿을 수 있는 은행가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업가에게 신용만큼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이로 인해 후대 교황도 계속 메디치 은행에 자금 운영권을 맡긴다. 유력한 고위 성직자들을 알게 모르게 후원하는 것은 당시 메디치를 비롯한 부자들에게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요하네스 23세의 무덤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
▲ 요하네스 23세의 무덤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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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 운영권이란 매우 넓은 범위의 개념이지만 쉽게 말해 각 지역의 다양한 화폐로 들어오는 헌금을 환전해 주고 교황청으로의 송금을 담당하는 것이다. 처음 길거리에 녹색천이 덮인 테이블에서 돈을 바꿔주던 환전상이 발전하여 은행이 되었다. 이런 환전업은 계속 발전하여 여러 가지 대출 상품과 지급 대행 등으로 발전한다.

피렌체 사람이 런던에 가서 물품을 구입하고자 하는데 무거운 금화를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은 힘들기도 할 뿐더러 위험하다. 그래서 피렌체의 은행업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신용장을 받는다. 이 신용장을 가지고 런던의 지점이나 제휴은행으로 가서 다시 돈으로 바꾼다. 이런 과정에서 은행은 수수료와 시세 변동에 따른 환차익을 얻는다.

이런 방법에 교황청도 관심을 가진다.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은 엄청난 양이었다. 송금이 늦어지는 지역의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에게는 심한 질책과 벌이 내려졌고 심한 경우 파문에 이르기도했다.

이렇게 거둬들인 돈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로마로 옮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은행의 신용장과 환어음을 이용했다. 은행업에 대해 암묵적인 인정을 해주고 필요할 때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업자와 교회의 유착 관계는 점점 공고해진다.

특별한 고객들을 위한 맞춤 상품 '재량예금'

은행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아무리 메디치 가문이라도 자신의 돈만 가지고는 어려웠다. 여러 군데에서 투자를 받아 해외 지점을 늘렸고 다양한 상품에 투자했다. 투자한 금액이 큰 동업자는 해외 지점장을 맡기도 했다. 이 투자자들 중에는 고위 성직자들도 있었다.

돈을 굴리는 행위 자체가 죄악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일반 투자자들처럼 투자금을 넣고 수익을 분배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재량예금'이라는 아주 희한한 상품이 발명되었다. 재량예금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돈을 맡겨 놓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돈을 정말 가만히 맡아주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은행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은행은 알아서 적절하게 돈을 굴려 수익을 남겼다. 예금주는 수익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신분이다. 은행업자들은 성직자에게 '재량'껏 '선물'을 했다. 이것은 이자나 투자 수익이 아니다. 그저 은행업을 하는 신자가 바치는 선물이었다. 그래도 수익율은 연 8~12퍼센트에 달했다. 물론, 예금주의 신원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교회도 무언가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은행업자들은 고리대금업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까 매우 걱정했다. 고리대금업의 죄를 씻는 방법은 살면서 얻은 이익을 죽기 전에 모두 토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도움을 받아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고리대금업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할 때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을 인정하고,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으로 피해를 봤던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각각 얼마를 돌려주겠다고 서약한다. 모두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 서약은 사후에 그대로 집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서약은 매우 모호하게 변한다. 내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쓴 불법적인 방법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식으로 바뀌었고, 사제들은 이런 애매한 서약을 인정해준다. 하지만 누군들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메디치처럼 여러 부유한 가문들은 이미 세속권력인 정부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받을 불이익이 두려웠던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와 수도원을 후원하는 것이다. 흑사병 등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시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헌금이 줄었다. 자연히 각 교회와 수도원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다. 교회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많은 성당들은 중앙 제단 양 옆에 작은 기도실(혹은 예배당)들이 여러 개 펼쳐져 있다. 교회는 이 기도실을 부유한 가문들에게 거액을 받고 '분양'했다. 소위 '후원권'이라는 것인데, 이를 받은 가문은 예술가들에게 의뢰하여 이 기도실을 치장하게 했다.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은 부자들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가문이 돋보이게 기도실을 아름답게 꾸며 사후에 안식을 얻기만 바랐다. 이런 후원의 대가로 기도실에는 후원해 준 가문의 이름이 붙고, 후원자는 죽은 후 성당에 묻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재정난을 이겨내고 낙후된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 후원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부자의 후원에 의존하게 되고, 자립심을 잃어 갔다. 전부는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피렌체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기도실과 예배당은 이렇게 탄생했다.

메디치 가문은 아예 교회 하나를 통째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산 로렌초 성당이다. 이곳은 메디치 가문의 전용 교회라고도 불리는데, 돈으로 자신들의 죄를 씻기 위해 공공 교회를 사유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산 마르코 수도원 건축에도 막대한 기부금을 냈다. 그 대가로 수도원 내부에 전용 기도실을 얻었고, 교황은 코시모의 죄를 사해준다는 공식문서를 보내주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전용 기도실 입구 옆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산 마르코 수도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전용 기도실 입구 옆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산 마르코 수도원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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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사례도 있다. 피렌체는 아니지만, 1300년대 초, 파도바에 엔리코 스크로베니라는 거부가 있었다. 그는 정부와 교회에 돈을 빌려주던 고리대금업자였는데 재산이 우리 돈으로 120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아예 자신의 땅에다 교회를 세워버린다. 토지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임대료처럼 자신의 땅에 세워진 건물의 소유권은 토지 소유주에게 있었다. 교회 설립은 깊은 신앙심의 표현으로 포장되었고 더 이상 고리대금업의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 교회는 개인의 소유물이었으며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헌금과 십일조 역시 교회 소유주의 몫이 되었다. 아울러 매매도 가능했다. 교회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한 상속수단이자 투자처가 된 것이다.(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이건 마치 현대 부자들이 각종 재단을 설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자본과 교회의 유착관계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대한 조직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교회에게 자본은 거부할 수도 없고, 빠져 나올 수도 없는 유혹이었다. 나중에는 자본이 오히려 종교를 잠식하기에 이른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자본은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모두를 장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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