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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기준

"너는 빨강색이니까 우리 편, 너는 파란색이니까 혼자."
"나도 딸기 맛 말고 바나나 맛 먹을래. 누나하고 같은 편 할래." 

10살, 8살, 6살 되는 삼남매는 편 가르기가 한창이다. 게임을 하든, 장난감을 고르든, 음식을 먹든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면 항상 누가 자신의 편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호불호보다는 자기 편이 먼저다.

문제는 아이가 홀수로 하나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첫째와 둘째가 한 편이 되어 막내를 쳐주지도 않거나, 첫째와 막내가 한 편이 되어 둘째의 심사를 건드리기 마련인데 이러나저러나 큰 소리가 나기는 매한가지다. 늘 한 놈은 울고 징징대며 결국 엄마, 아빠의 잔소리를 듣는다.

그럼 아이들의 편 가르기가 가장 정점으로 치달을 때는 언제일까? 게임할 때? 먹을 때? 입을 때?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가 아이들 세계에 끼어들 때다.

아빠는 누구 편?
▲ 삼남매와 아빠 아빠는 누구 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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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나 아빠가 아이들 놀이에 뛰어들면 그때부터는 전쟁이다. 둘 다 참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중에 하나만 놀아주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서로 엄마나 아빠 편을 하겠다며 난리가 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상관없다. 오로지 엄마, 아빠와 같은 편을 하는 게 1순위다.

"내가 첫째니까 내가 아빠하고 같은 편 할래. 너희 둘이 편먹어."
"아, 왜 누나는 항상 누나 마음대로 해? 아빠는 남자니까 남자끼리 편먹을 거야."
"아니야. 아빠가 제일 잘 하니까 제일 못하는 나랑 편먹고, 누나랑 형이랑 같은 편 해."

다들 하나같이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는 녀석들. 이유가 뭐가 됐든 아이들의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어쨌든 어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선택 기준은 바로 나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그랬다. 어렸을 적 내가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대적이었다. 아버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힘세고 친절하고 멋있는 남자였으며,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예쁜 여자였다. 난 궁금한 게 생기면 항상 어머니께 여쭤봤고, 어머니는 늘 답해주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강아지 소리마저 내게 번역해주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할라치면 그때의 모습들이 먼저 떠오른다. 세상의 전부였던 그 당시 받았던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요즘 뵙는 연로한 모습에 가끔 놀라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나의 아이들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어쩌면 나처럼 지금의 내 모습이 아이들이 기억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의 선택이 곧 아이들의 기준이며, 아이들에게 나는 전부이다.

부모로부터의 독립

아직은 엄마, 아빠가 세계의 전부다. 아직까지는
▲ 삼남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세계의 전부다. 아직까지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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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모님의 절대성을 의심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때였다. 아버지는 예전만큼 나를 사뿐히 들어 올리지 못하셨고, 밤마다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는 엉망이었다. 어렸을 때는 '똥' 이야기만 나와도 재미있었는데, 초등학생에게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너무 비논리적이었고, 구간 반복이었다.

어머니 역시도 달라지셨다. 어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해 곧장 대답하시기보다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물론 내게 더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제야 난 어머니가 세상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알 수도 있음을, 어머니가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나의 절대적인 부모님이 사라지다니. 게다가 그 자리에 서 계신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자기 자식에게 한없이 약한 이가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이후 나의 성장은 자아와의 투쟁이었다. 부모님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절대적인 그 무엇을 찾고 싶었다. 아니 찾아야만 했다. 세상에 나 혼자라면 너무 외롭지 않은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종교도 열심히 다녔다. 선생님들과 치기 어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딱히 답은 없었다.

다만 달라진 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였다. 난 더 이상 부모님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당신들과 의견이 다를 때는 정확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다. 부모님이 더 이상 나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말씀드렸고, 다행히 부모님은 그런 나를 존중해주셨다. 대학을 선택하고 직장을 찾고 결혼을 할 때에도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어차피 당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식이니만큼 단지 믿고 응원해 주실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우리 아이들을 언제 어떻게 독립시킬 수 있을까? 녀석들은 언제쯤 아빠와 같은 편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딸이 정의당?

어버이날인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 깜짝등장한 딸 다혜씨가 카네이션을 문 후보에게 선물하고 있다.
▲ 문 후보가 받은 아주 특별한 카네이션 어버이날인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 깜짝등장한 딸 다혜씨가 카네이션을 문 후보에게 선물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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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언론은 하루 종일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정의당 당원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경향신문이 '단독'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올리자 다른 언론들이 앞 다투어 이를 반복 보도한 것이다. 덕분에 대통령의 딸과 정의당은 하루 종일 포털 검색어 수위에 올라있기도 했다.

물론 처음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 어떤 사회보다도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이며 게다가 대통령의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한국에서 대통령의 딸이 다른 당적을 가지고 있다니 눈길이 갈 수밖에. 서구에서야 대통령의 자식들이 다른 당적을 갖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 밖의 일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까지 대통령의 자식들을 보자. 대부분이 막후에서 정국에 영향력을 끼치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겼었다. 박근혜, 박지만을 비롯하여 전재국, 전재용, 노소영, 김현철 그리고 최근 'DAS 의혹'의 핵이 되어버린 이시형까지.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딸은 아예 아버지와 당적을 달리하고, 그 당은 비교적 작은 규모이니 더 흥미로울 수밖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기사는 불편하다. 대통령의 딸이 아버지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다른 당적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를 무슨 특종인 양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의당원인데 어쩌란 말인가? 자식이니까 아버지와 같은 편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 10살밖에 안 되는 내 자식이나 할 소리 아닌가.

신경을 끄자
▲ 노회찬 의원의 일갈 신경을 끄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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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사가 진영논리를 더욱 확대 재생산시켜 사회적으로 쓸데없는 갈등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딸이기 이전에 자유롭게 정당활동을 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편견이나 특정한 주장을 공고히 하는 데 이 기사를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아래 댓글들처럼 말이다.

'딸내미는 애비보다 더 좌파네. 당연 더 친북이겠지? 나라 꼴 좋다' - OO일보 댓글

'다른 사람을 민주당에 권유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반대파당에 입당한다고? 쇼인가? 간첩인가? 정권 끝나서 전례행사로 지 애비가 구속되면 알겠지만, 지금 밝힐 수 없을까?' - OO일보 댓글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이다. 따라서 기사거리를 찾을 때에도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딸이 정의당원이라는 사실은 아직 10살 까꿍이가 전적으로 아빠 편이라는 사실만큼만 중요하다. 부디 언론들이 기사를 작성함에 있어서 경중을 가리기 바란다.


태그:#육아일기,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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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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