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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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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김태리(연희 역)는 가공 인물이지만, 1987년 길 곳곳에는 진짜 연희가 있었습니다. 어떤 연희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삼베를 뒤집어쓰고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연희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스크럼을 짜고' 민주주의를 말하며 정문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어떤 연희는 카네이션과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들고 길에 나섰습니다. 수많은 연희가 있었지만 제대로 기록된 연희는 없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987년의 연희를 찾아 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87학번과 87년생은 딱 스무 살 차이다. 87학번이 6.10항쟁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면, 87년생은 명박산성과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겪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 지 경험한 것이다. 87학번인 김금숙 활동가(왼쪽)와 87년생 남쌩(가명)이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이한열동산에서 만났다. ⓒ 남소연
87학번과 87년생은 딱 스무 살 차이다. 87학번이 대학 신입생으로 6.10항쟁과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면, 87년생은 막 세상 밖으로 나왔다. 87학번은 독재를 경험했고, 87년생은 명박산성과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겪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경험한 것이다.

87학번은 집회에서 페미니스트존(집회 현장에서 여성이 겪는 성희롱, 성추행, 차별적인 발언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공간-기자 말, 이하 페미존)을 상상할 수 없었다. 1987년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없었다. 여성주의를 말할 틈도 없이 독재와 싸웠다. 87년생은 새로운 여성운동을 경험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시위와 낙태죄 폐지 시위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었다.

87학번과 87년생이 20대를 보낸 시대는 20년 시차가 있지만 그사이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일터에서 동료보다 여성으로 보는 시각은 그대로였다. 회식하며 좋은 데를 언급하는 남성 문화도 여전했다. 87학번과 87년생, 두 여성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다르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지난 18일과 25일 두 차례,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금숙(이하 김): 87학번. 1987년에 처음 광주항쟁 비디오를 봤다. 선배 손을 잡고 6월 항쟁에 동참,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남성 중심성이 강한 노동운동 현장에서 27년째 여성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남쌩(이하 남): 87년생. 2006년 선배에게 운동화를 빌려 신고 처음 KTX 여승무원 해고 투쟁에 참석했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나이처럼 이른바 '영페미니스트'와 '영영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낀페미니스트' 같은 느낌을 종종 받는다.
(영페미: PC통신이 등장한 1990년대부터 닷컴 시대가 열린 2000년대 중반 활발히 활동한 페미니스트-기자 말)

"87년생 얼마 전에 처음 봐"..."윗세대 학번 알기 어려워"
'198769757922' 이한열 동산에 있는 숫자의 의미는 이러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6월9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출정을 준비하는 집회에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7월5일 새벽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그는 세상을 떠났다. 7월9일 시민들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희생을 애도하며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 때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그 옆에 87학번 김금숙과 87년생 남쌩이 서 있다. ⓒ 남소연
-영화 <1987> 어떻게 봤나.
: "내 얘기 같아서 내내 울었다. 연희가 겪은 일들, 이를테면 새시 안으로 들어가면 살고 아니면 맞고 진짜 그랬다. 다만 나는 여대였으니까 남자 선배가 아니라 여자 선배가 나를 확 끌고 가게 뒤로 숨거나 새시 안으로 들어가 살았던 적이 많지. 멋진 남자 선배가 아닌 멋진 언니들을 보며 운동했다."

: "주위에서 연희가 좀 수동적이지 않았냐는 이야기가 있더라. 오히려 이 영화가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 건지 분명하게 드러났으면 어땠을까 싶다. 여성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은 노동자나 이런 다른 스토리는 뭐가 있었을까 궁금했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시선에서나 봐야 하나, 싶었다."

- 87학번과 87년생의 만남이다. 사회 생활하며 만나기 어려운 세대 아닌가?
김: "원래대로라면 87년생을 볼 일이 없다. 그런데 딱 얼마 전에 사람을 뽑았는데 87년생이었다. 그 때 처음 87년생을 만나봤다. 역시 다르더라, 아(감탄) 굉장히 다르더라. 나는 87년부터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관행과 생각이 굳어지는 측면이 있었다. (운동 내부에서도) 젊은 세대, 여성, 소수자를 포함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번에 뽑힌 87년생 친구는 생각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아무래도 이판이 좀 세게 비판하는 게 있잖나. 처음 회의할 때 그걸 딱 집어내더라. 안건을 제시한 것뿐인데, 너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거 같다면서. 다들 입이 딱 벌어졌지."

남: "사실 윗사람을 만날 때 학번을 묻지 않는다.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교수님들은 87학번보다 윗세대일 거고, 아니면 그 다음 세대이지 않을까. 주로 선배로 만나는 사람들을 따져보면 90년대 학번 같다. (김금숙씨를 가리키며) 87학번이라서 차이가 크게 날 줄 알았는데, 실제로 굉장히 스타일리시해서 놀라기도 했다(웃음) 젊은 이모 같은 느낌이랄까.(웃음)"
영화 <1987> 한 장면. 주인공 연희(김태리 분)가 시위 대열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87학번과 87년생, 첫 집회의 기억이 다를 거 같다.
김: "87학번이니까 3월에 입학하고 6월에 6.10 항쟁을 겪었다. 뭘 알았겠나. 시작은 광주 항쟁 비디오였다. 그때 그걸 보면 뭔가 안 할 수가 없다. 당시 모든 과에 학회가 있었고 3학년 선배들이 1학년 후배를 의식화했다. 그 사이에 4.13 호헌 조치가 나왔고 선배들이 후배들을 데리고 다녔다. 6월부터 매일매일 시위였지. 6월 9일에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다가오는 게 달랐다. 동년배가 바로 옆에서 죽은 거니까. 그 사진이 모두를 일어나게 했다."

남: "2006년 KTX 승무원의 해고 농성장에 간 게 처음이었다. 선배가 같이 가자는데 그날 구두를 신었나 그래서 운동화를 빌려서 신고 갔다. 현장에서 충격이 컸다. 이를테면 지금과는 방패 재질이 달랐다. 땅에다 방패를 갈면 밑이 뾰족해져서 굉장히 위협적이다. 그 때 전경들이 둘러싸고 방패 사이로 가려고 하다 긁혔는지 훅 상처가 나고 피가 났다. 그다음부터 집회에 나가게 됐다. 너무 억울해서." 

"성희롱이라는 용어, 90년대 등장"
87학번과 87년생. 딱 스무 살 차이인 이들이 찾은 연세대 이한열동산. 최루탄에 맞은 고 이한열 열사와 부축하는 동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동상 너머로 '한열이를 살려내라' 메아리치는 듯 하다. ⓒ 남소연
-집회 분위기는 어땠나. 촛불집회는 페미존도 등장했다. 87년도에는 이런 분위기를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 "어우, 페미존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물론 6월 항쟁에도 여성들은 당연히 있었다. 많았다. 어느 현장에도 여성이 없었던 적이 없다. 다만 기록되지 않았다. 어떤 역사가 기록에 남는다는 건 발언권이 있거나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때 뿐이니까. 당시 시위가 되게 과격했다. 교문에서 시위하는 것도 막고 시내에 가도 경찰이 막고 그랬다. 최루탄 쏘고 뾰족한 봉 같은 걸 들고 경찰들이 달려와서 패고 그랬다. 그럼 뭐가 필요하냐. 앞에서 누군가 싸워줘야 하지 않겠나. 약간 화력이 필요하다. 전투조, 사수조가 필요한데 남성들이 많이 했다. 여성들도 현장에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공급하고 그랬다."

남: "개인적으로 2008년 촛불 집회에서 좀 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청역에 내리면 벽에 대자보 붙고, 그 공간 자체가 지하철역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된 것 같았다. 자유발언대가 많아서 좀 더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예비군복 입고 나와서 지켜주니 어쩌니 이러면 '니가 지켜주겠냐 싸움 많이 해본 언니들이 더 안전하지'라는 생각도 했고. 2016년 이번 촛불집회는 페미존이 있어 여성주의 주제로 사람들이 블록을 형성해서 다닌 것도 좋았다."

: "87년도에는 독재 타도라는 너무나도 명확한 적이 있었다. 이 중요한 걸 꼬꾸라트리기 전에는 다른 걸 언급할 수 없었다. 젠더 감수성의 여지도 없고. 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위해 달렸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시위 1987년 6·10항쟁 전, 이화여대생 사진. ‘80년 5월에서 87년 6월로’의 사진집 첫 페이지에 실려 있다 (저작권자 윤석봉 전 로이터통신 기자, 눈빛출판사 제공) ⓒ 윤석봉
-80년대는 여성주의라는 말도 없었나 보다.
: "전혀 없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부터 누적된 차별적 경험이 많다. 다만 그 서러움과 차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이름이 없었던 거지. 대학에 들어와서 여성학을 배우긴 했지만, 그 수업과 내 삶이 연결이 안 됐다. 그런데, 졸업하고 딱 사회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무언가 느끼기 시작했다. 노동의 현장에 와서 적나라하게 느꼈다. 20대에 이게 성희롱인지 뭔지도 몰랐다. 내가 스물다섯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게 91년이다. 성희롱에 대한 정의가 생긴 게 99년이다. 그 전에는 성희롱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 정도였다. 30대 여성에게는 또 다른 평가가 시작된다. 나이에 따른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결혼 언제 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고."

남: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도 개념도 있던 세대다. 앞서 영페미가 있었고, 반성폭력 운동 이후의 세대다. 87학번과는 분위기가 달랐을 거다. 대학 안에서 여성주의 언어가 다 있었다. 표면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위주의적이면 안 되고, 학벌주의적이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그런데 87학번 세대와 비슷한 경험도 많다. 연대를 가거나 노조 후원주점을 갔을 때 겪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뒤풀이에서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치근덕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웃긴 건 내가 30분을 싫다고 얘기해도 안 먹히던 게, 다른 남자 동기가 오는 순간 상황 종료됐다. '쟤가 네 남자친구냐'면서 그냥 가더라." 

: "내가 겪었던 일을 아직도 겪고 있는 거다. 20년이 지났는데. 나는 일을 열심히 하는데, 끊임없이 나를 여성으로 평가한다거나. 동지가 아니라 여자인 거다."

- 최근 페미니즘은 이른바 운동권이나 단체를 벗어나 다양하고 펼쳐지고 있다.
김: "활동 방식 완전 다르더라. 경이롭게 보인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활동은 사람이 하는 건데 사람이 안 바뀌니까 옛날 방식대로 하는 부분도 있다. 막연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87년생 활동가가 출근해서 '우리 노조의 SNS 활용 방법' 해서 여러 방안을 갖고 왔다. 재미있는 건 이걸 우리 세대에 설명해주려다 보니 종이에 크게 설명서를 써왔다는 거지. (웃음)

나도 디지털과는 거리가 멀다. 뭘 하려고 하면 자꾸 에러 메시지가 뜨고 그렇다. 하지만 하긴 해야 하지 않나. 기술의 발전이나 네트워크 방식이 바뀌고 있는 걸 느낀다. 완벽하게 바뀌고 있다. 바뀐 네트워크와 그 반응을 생각하지 않으면, 고립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방식을 고수하면 천연기념물이 되는 거다."

남: "연대나 지지하면서 인증사진을 남기는 식의 참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세대와 내가 또 좀 다르다. 어쩌다 오프라인에서 그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SNS 계정을 대여섯 개 돌리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더라. 나는 아직 오프라인 베이스가 편하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을 보며 대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다."

"남성 스스로 노(NO)라고 할 용기가 필요해"
최강한파가 들이닥친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이한열동산에서 다시 만난 87학번과 87년생. 목도리를 둘러주며 온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변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남성들도 있다. 뭐부터 해야 할까?
김: "성평등 교육에 강사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누가 봐도 듣기 싫어서 앉아있는 남성들이 있다. 자신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피해의식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성에게 적대감은 없다. 속으로 좀 모자란다고 생각할 때는 있어도.(일동 웃음) 남성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 그냥 내 생각이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하는 연습을 하라고. 남성들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하다. 여성이 동료라면 동료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고 말한다.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태도가 제일 나쁘지.

또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면 안 되는 거다. 내가 칭찬했는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고 따질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불쾌해 하면 사과해야 하는 거다."

: "제 주위에 그런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거절하는 거라더라. 회식으로 여자 나오는 어딜 가자 이럴 때 거절하는 거나 남성의 또래문화, 직장문화에 반기를 드는 것 같은. 일단 그럴 때 '노(NO)'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생각보다 힘든 일일 것이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혹은 20년 후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내가 겪은 게 무엇이었는지 말해주고 지지하고 연대하는 선배들이 없었다. 혼자 맨땅에 헤딩하고 부딪히며 좌충우돌했다. 내 정체성은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 내에서 여성이 운동의 주체로 존재하는 거다. 우리 노조의 여성조합원들에게 들어보면 여전히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적인 회사들이 많더라. 이 안에서 많은 여성 후배들이 너무 상심하고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그런 분들한테 무기를 쥐어주고 싶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하며 가진 네트워크를 공유하면서.

연결될수록 강하다. 마이너들은 무조건 연결돼야 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연결되는 게 여성이 살길이다. 다만 여성은 네트워크 자원이 적어 힘들다. 회사의 인사부장과 상무가 남자일 때 교섭을 하는 여성은 불리하고 힘들다. 가능하면 내가 가진 자원과 경험들을 공유하고 싶다."

: "경험이 전수되지 않는 게 이런 거구나 종종 느낀다. 1987년이라고 한다면, 이한열 열사의 이미지만 강하다. 사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을 텐데. 노조라고 하면 원탁에서 남자들만 있다. 경험이나 이야기가 단절된 거다. 지배적인 역사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거기에서 비켜 나간 사람들끼리 어떻게 만날 수 있나 그 지점을 찾아가고 싶다."

태그:#페미니스트, #87년생, #87학번,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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