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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집에 시조카가 놀러왔다. 30평도 더 되는 창고에 주차된 차 '4033'을 보고 '외삼촌네 차가 있으니 이제 대한민국에 차 없는 사람은 없겠네' 하고 농담했다.

"요즘 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차 갖고 오셨죠?"
"주차권 필요하시죠?"

요즘이 아니라도 언제부턴가 어떤 모임 등에 가거나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 듣는 말이다. 멀리서 놀러 온 친구를 마중하러 갔을 때 남편이나 내가 운전하는 걸 본 지인들은 말했다.

"오~ 형이 이렇게 운전하는 차를 타 보는 날도 있다니!"
"세상이 변하긴 했네~"

8년 전, 결혼하고 20년 넘도록 자동차 없이 살아왔던 우리에게 차가 있어야 될 사정이 생겼다. 경기도 구리에서 살고 있을 때 이천 농가 쪽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서울을 가야 했기에 터미널에서 내려 집까지 한 시간 정도 걷기에는 무리였다. 그것도 늦은 밤에.


중고 카키색아반떼, 앞뒤로 부드러웠던 너의 모습, 첫 인연
 중고 카키색아반떼, 앞뒤로 부드러웠던 너의 모습, 첫 인연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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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동차를 새로 만나도 '너'를 기억할게.
 어떤 자동차를 새로 만나도 '너'를 기억할게.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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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입은 듯한 본네트의 상처들.
너를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화상입은 듯한 본네트의 상처들. 너를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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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면허가 있는 남편은 연수를 받기로 하고 나는 운전학원을 알아보았다. 학원접수가 끝나자마자 순서를 기다려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오십 생애 처음 운전이란 걸 하는 순간이었다. 시속 20킬로로 움직이는 연습차 안에서 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운전은 피할 수 없었기에 큰 압박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계에 흥미가 있거나 속도를 즐기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내겐 전혀 없었다. 기계치에 방향 감각도 둔하다. 그래서인지 코스돌기 세 번째 만에 겨우 통과하고 도로주행 한 번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98년식 아반떼 중고 4033'을 만났다. 검은 빛깔이 도는 진한 카키색이었다.

앞뒤좌우를 살펴봐도 차 없는 집은 우리뿐이었다. 굳이 차를 구입해서 기동력 있게 움직일 만한 생활이 아니기도 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는 돈이 없었다. 차 한 대를 굴리며 남편의 시간강사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형편에서 그 비용은 큰 무리였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걸어 다녔고, 먼 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급할 때는 택시를 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하고 바로 일을 하게 되었다. 집과 직장을 반복해서 운전하다보니 그 길만큼은 운전에 별 부담이 없었다. 차로 15분 정도 되는 그 길은 한적한 농로였다. 신호등도 없었다. 다만 좁은 길 앞뒤로 차가 보이면 '얼음'이 되었다. 막다른 상황이 될 때 '초보예요~'라고 외치면 그 분들이 먼저 도와주었다.

내가 주로 운전했던 농로는 몇 군데 코너를 돌아야 했다. 코너가 있는 데는 대부분 다리 아래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돌고 나면 뭔가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 운전 진짜 잘한다!"라는 말은 딱 한 번 들을 수 있었는데, 그곳을 도는 순간 동네 아주머니가 우연찮게 봤던 모양이다. 그 분은 내가 논두렁에 빠졌다는 걸 전혀 짐작도 못했으니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한겨울, 전날 내린 눈이 기온이 떨어지는 바람에 꽁꽁 얼어있었다. 주일이었다. 이천, 아미리성당이 있는 교회로 가려면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길은 남편이 항상 운전했고 햇빛이 좋은 날은 집에서 멀다싶었지만 걷기도 했다. 운전을 부탁했지만 남편은 외출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남편은, 길이 미끄러워서 운전하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 말에 '나도 혼자 운전해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올라왔다.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눈길을 기다시피 했다. 농로의 코너도 이미 두어 번 지났고 불쑥 솟은 자신감이 오버되는 순간, 핸들은 이미 내가 가려고 했던 길과는 다른 길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오~ 하느님!!! 제가 잘못했어요!!!"

차가 두세 번 텅, 텅 소리를 냈다. '벼랑'에 빠졌다는 직감. 떨어지는 순간, 나는 핸들을 꼭 잡고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뜨자 차는 논에 빠졌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주변은 너무나 고요했다. 잠시 교만했던 마음을 뉘우쳤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차는 논 한가운데 있었다. 다행히 다른 쪽으로 차를 운전해서 올라갈 수 있는 시멘트길이 조붓하게 나 있는 논이었다.

"아이고,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 논의 벼가 자라고 있었다면 배상을 해줘야 할 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남편이 차가 반대편으로 빠졌다면 차는 물론 당신도 위험했을 거라고 했다. 반대편은 가파른 다리 아래였다.

4033을 이끌고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서울에서 남편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춰 밤 11시 넘어 마중을 가야했다. 가뜩이나 운전이 미숙한테 밤 운전은 그야말로 손에 땀이 나게 하는 긴장으로 더듬거리다시피 움직였다. 깜깜한 농로에 상향등을 켜고 잔뜩 졸아서 덜덜거리는데 희끄무레한 물체가 휙, 나타났다. 그게 고라니라는 걸 알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무서웠다.

이천에서 우리는 남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양주에서 5개월 정도를 머물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대전으로 내려왔다. 이천을 떠나면서 4033은 거의 남편의 전용차가 되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도 4033의 역할은 충실했다.

도시로 옮겨진 4033은 눈비를 가려주고 햇빛을 차단했던 이천에서의 A급(?) 주차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따로 주차시설이 있는 아파트도 아니고, 빌라의 좁은 주차공간은 이웃들 간의 시빗거리가 되기 십상이어서 아예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적당히 주차하게 되었다.

이미 이천에서 내 어설픈 운전으로 집의 담을 들이박아 한때 애꾸가 되기도 했던 4033. 논에 빠져 한때 몸살을 품었던 차. 추위와 더위를 온 몸으로 견디던 4033은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저기 몸의 통증을 호소했다. 본네트의 표면은 마치 더위에 화상을 입은 피부 같았다.

부분 도색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도졌다. 명절에 장거리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4033의 건강상태를 체크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드러나는 환부의 처방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여름에는 타이어 교체도 모두 했지만 그것만으로 4033을 데리고 있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공업사에서도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것을 고민해보라고 했다. 우리는 결정해야만 했다.

폐차장으로 가는 4033.
 폐차장으로 가는 4033.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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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3을 보내기로 한 날,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그래봐야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떠나기 직전의 4033을 사진에 담고,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구리와 이천, 남양주, 대전을 오르내리며 거의 8년을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스쳤다. 손질해서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닌 폐차장으로 가는 4033이기에 더 없이 애틋했다.

부디 잘 가거라 4033아.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덧붙이는 글 | 유어스테이지에도 송고되었습니다.



태그:#중고자동차, #운전, #농로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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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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