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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 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망미대 언덕에서 본 의양3리 정경이다. 바로 아래 춘양성당이 있고 성당 가까이 남쪽에 만산고택이 있다.
▲ 춘양고을 정경 망미대 언덕에서 본 의양3리 정경이다. 바로 아래 춘양성당이 있고 성당 가까이 남쪽에 만산고택이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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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대 언덕에서 본 의양3리의 낙천당마을 정경이다. 기찻길 바로 아래 태고정이, 멀리 권진사댁이 있다.
▲ 춘양고을 정경 망미대 언덕에서 본 의양3리의 낙천당마을 정경이다. 기찻길 바로 아래 태고정이, 멀리 권진사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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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경북 봉화에 정착한 사족은 '봄볕'고을, 춘양(春陽)으로 발을 넓혔다. 그중에 안동권씨와 진주강씨의 족적이 깊고 짙다. 안동권씨는 닭실마을의 입향조, 권벌의 현손(玄孫), 권착이 춘양에 들어와 살았고 진주강씨는 법전문중 사람, 강용(1846-1934)이 1800년대 말에 들어왔다.

진주강씨와 관련된 집으로는 춘양면 의양3리 현말(현동)에 만산고택, 낙천당마을에 태고정이 있으며 학산리에 와선정이 있다. 안동권씨의 집으로 낙천당마을에 권진사댁, 의양2리 동촌(동마)에 한수정이 남아있다.

진주강씨 법전문중 관련 집들

진주강씨 가운데 춘양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은 법전마을 입향조, 강흡이다. '태백오현'이라 불리는 강흡, 홍우정, 심장세, 정양, 홍석은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보이자 벼슬을 멀리하고 태백산 아래, 춘양에 은거하며 서로 교유하였다. 교유한 곳은 와선정. 춘양 중심지에서 10리 떨어진 학산리 골띠마을 계곡에 있다.  

구한말 법전강씨 후손 만산 강용은 조선강토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우국충정의 결기를 보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분강개하며 낙향해 1878년, 만산고택을 짓고 정착하였다. 만산고택은 현말에 있다. 현말은 춘양현이 있던 곳으로 춘양의 중심이다.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답게 솟을대문이 장대하다. 굴뚝은 만산의 절개를 드러내듯 곧게 솟았다.
▲ 만산고택 솟을대문과 굴뚝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답게 솟을대문이 장대하다. 굴뚝은 만산의 절개를 드러내듯 곧게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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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를 기약하며 지은 집답게 솟을대문이 장대하다. 곧게 뻗은 굴뚝은 몸은 작아도 그 기세는 당당하여 만산의 절개를 드러낸 것 같다. 사랑마당이 시원하다. 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바로 안채가 잇닿아 있다. 사랑마당 남쪽에 서재가, 북쪽에 별채,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이름에 만산의 뜻이 고스란히 담겼다. 세상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고요한 집이라 하여 집 이름을 정와(靖窩)라 하였다. 별채는 집 앞에 버드나무를 심고 살았다는 도연명의 절개를 닮으려 한 듯 버드나무, 류(柳)를 넣어 칠류헌(七柳軒)이라 했다.

종손이 제일 아낀다는 칠류헌은 담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처마 밑에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 '칠류헌', '사물재(四勿齋)', '백석산방(白石山房)'... 편액이 다닥다닥하다. 여러 문인들의 발길이 꽤 잦았던 게다.

굴뚝은 어디 있을까. 마루 밑에서 겨우 발견하였다. 내굴길(연도)도 없이 굴뚝 자리만 남았다. 검게 그을린 자국은 예전의 자취일 뿐, 굴뚝을 아예 없애버렸으니, 바깥세상 일에 일체 관여치 않겠다는 선조의 뜻을 '헤아려도 너무 헤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담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다닥다닥 붙은 편액은 문인들의 자취.
▲ 칠류헌 담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다닥다닥 붙은 편액은 문인들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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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구조를 바꾸었는지 굴뚝은 할 일이 없어졌다. 굴뚝이 있었다 해도 바깥세상에 관여하지 않으려한 만산의 뜻을 담아 보이지 않게 마루 밑에 숨겨놓았을 게다.
▲ 칠류헌 굴뚝자리 난방구조를 바꾸었는지 굴뚝은 할 일이 없어졌다. 굴뚝이 있었다 해도 바깥세상에 관여하지 않으려한 만산의 뜻을 담아 보이지 않게 마루 밑에 숨겨놓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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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이 많기로 소문난 집이다. 편액 글씨는 인맥과 통한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작품이 모여 있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만산(晩山)'은 대원군 글씨다. 오세창의 글씨도 보인다. '존양재(存養齋)'와 '칠류헌' 글씨다. 해강 김규진의 글씨, '백석산방'도 있다. 서실에는 영친왕이 8세에 썼다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 걸렸다. 이밖에 강벽원의 '정와', 권동수의 '차군헌(此君軒)' 한일동의 '사물재' 편액도 보인다. 

만산이 집 뒤 언덕에 올라 국운회복을 빌었다는 망미대(望美臺)에 올랐다. 망미대 옆으로 영동선이 지나간다. 몹시 굽은 곡선 구간이다. 이 구간 때문에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어원이야 억지춘향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만, 힘 좀 쓰는 정치인이 '억지'를 부려 '춘양'역을 거쳐 가도록 기차노선을 곡선으로 변경하는 바람에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춘양역으로 가는 곡선구간이다. 억지춘양의 말을 낳은 구간이다.
▲ 영동선 기찻길 춘양역으로 가는 곡선구간이다. 억지춘양의 말을 낳은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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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대 남쪽으로 만산고택과 춘양성당이, 북쪽으로 태고정과 낙천당마을이 내려다보인다. 태고정은 만산이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망국의 한을 달래려 지은 정자다. 태고정 주위 바위를 '만취'라하고 소를 '세심', 대를 '망미대'라 했다. 기찻길이 나기 전까지 만산고택에서 망미대, 태고정에 이르는 길은 서로 통해서 쉽게 오갈 수 있었다.

안동권씨 집들, 한수정과 권진사댁

봉화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가문은 뭐니 해도 닭실권씨다. 춘양에 일찍이 흔적을 남겼다. 집안 전답이 있던 의양2리의 동촌에 한수정(寒水亭)을 지었다. 애초 이 자리에 권벌이 지은 거연헌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1608년, 권벌의 손자 권래(1562~1617)가 다시 지은 것이다.

한수정의 ‘한수’는 차가운 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학습하라는 뜻이니 굴뚝은 마루 밑에 숨겨 불기운을 적게 하려 한 것이겠지.
▲ 한수정 굴뚝 한수정의 ‘한수’는 차가운 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학습하라는 뜻이니 굴뚝은 마루 밑에 숨겨 불기운을 적게 하려 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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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들에 불기운을 아주 적게 들이려는 듯 굴뚝은 툇마루 밑에 조신하게 숨어 있다. 한수정의 '한수'는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힘쓰라는 뜻이니 그 뜻을 품은 것이다.  

한수정을 지은 권래의 손자, 권착(1632~1705)은 아예 춘양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 후 성암 권철연(1874-1951)의 아버지, 권중하(1849-1919)는 1880년경 의양3리 낙천당마을에 권진사댁을 짓고 운곡에서 이전하였다. 이 무렵 가세가 번창하여 빈객이나 문인의 방문이 잦았다. 특히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권철연의 아들 권상경(1890-1958)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운동을 주도하였고 1926년, 심산 김창숙이 독립자금을 모집할 때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심산을 숨겨주는 독립운동을 하였다. 

권진사댁의 솟을대문과 대문채 굴뚝은 바래미마을의 남호구택을 닮았다. 두 집 모두 거액의  독립자금을 대준 점도 같다. 집 구조는 만산고택과 비슷하다. 동향집인데다 넓은 사랑마당이 있으며 'ㅁ' 자 모양의 안채에, 안채 남쪽에 담을 쌓은 점도 같다. 남호구택은 1876년, 만산고택 1878년, 권진사댁은 1880년에 지어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연구를 굴뚝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랑채 굴뚝이라 그런 겐가.
▲ 권진사댁 사랑채 북쪽 굴뚝 연구를 굴뚝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랑채 굴뚝이라 그런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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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굴뚝 몸통 밖으로 내밀도록 했다. 안채 굴뚝이라 그런 겐가. 우연인지 몰라도 음양의 조화려니 생각한다.
▲ 권진사댁 안채 북쪽 굴뚝 연구를 굴뚝 몸통 밖으로 내밀도록 했다. 안채 굴뚝이라 그런 겐가. 우연인지 몰라도 음양의 조화려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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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안채의 북쪽 굴뚝은 집채에 비해 아주 소박하게 생겼다. 수키와로 연구(煙口)를 만들었다. 사랑채 굴뚝 연구는 몸통에 숨었고 안채 굴뚝 연구는 몸 밖으로 나와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음양의 조화려니 생각했다. 나머지 굴뚝은 안채와 후원, 사랑채에 하나씩 있다. 봉화에서 본 굴뚝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 아닌가 싶다.

춘양목 옹이가 떨어져 나간 구멍으로 본 안채 정경. 딱 이만큼만 보라는 뜻으로 알고 물러섰다. 보이는 이 만큼이 우리가 지금껏 알았던 봉화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 권진사댁 안채 정경 춘양목 옹이가 떨어져 나간 구멍으로 본 안채 정경. 딱 이만큼만 보라는 뜻으로 알고 물러섰다. 보이는 이 만큼이 우리가 지금껏 알았던 봉화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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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서 제일 아름답고 정성을 들여 만든 굴뚝 아닌가 싶다. 장독대와 굴뚝, 협문이 함께 있는 풍경이 참 좋다.
▲ 권진사댁 안채 굴뚝 봉화에서 제일 아름답고 정성을 들여 만든 굴뚝 아닌가 싶다. 장독대와 굴뚝, 협문이 함께 있는 풍경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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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처마에서 떨어져 있고 키는 처마보다 높다. 몸통은 암키와로 줄무늬를 내고 줄무늬 사이에 백회를 발라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굴뚝 꼭대기, 연가(煙家)도 보통 정성을 다한 게 아니다. 수키와와 암키와로 조화를 부려 그야말로 집 한 채(家)를 만들어 놓았다. 

서실 앞이다. 뜻밖에 마주하거나 들어서 반가운 사람이 있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권상경의 독립유공을 표창한 '노무현'. 반가운 마음에 내 생각은 다른 데로 향했다.  

선조의 독립유공에 대한 표창내역이 눈에 띈다.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노무현. 남들이 하듯이 봉화에서 봉하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떠올리고 말았다.
▲ 권진사댁 서실과 표창장 선조의 독립유공에 대한 표창내역이 눈에 띈다.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노무현. 남들이 하듯이 봉화에서 봉하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떠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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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봉화와 봉하마을을 헷갈리며 봉화에 가면 봉하마을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하더니만, 여행을 마무리하며 결국 나도 봉화에서 봉하마을을 떠올리고 말았다.

'헷갈린 게 아니라 그리워하는 거였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안부 말을 전했다.

"세상은 좀 나아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잘 계신 거죠?"

덧붙이는 글 | 봉화 굴뚝 이야기 마지막 편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그:#봉화, #굴뚝, #춘양면, #만산고택, #권진사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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