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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헌철 군독타!!"

'파쇼헌법 철폐하고 군부독재 타도하자!'라는 구호의 줄임버전입니다. 이젠 대한민국 어떤 시위 현장에서도 이런 구호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한민국은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고 형식적인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이 민주화 운동 이후로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진보와 퇴행을 오가며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택하면서 많은 부침을 겪어왔습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30년이 지난 2017년. 더 이상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시금 끓어오른 민주 시민들은 새로운 국민의 대표를 선택하고 또 다른 차원의 민주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100도씨 표지
 100도씨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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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30년 전 대한민국 시민들의 투쟁 모습을 그린 영화 <1987>가 만들어져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이전에도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영화만큼이나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만화책 <100도씨>입니다.

이 만화는 최규석 작가의 작품입니다. 웹툰으로 시작해 동명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최근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송곳>을 그린 인기있는 만화가입니다. 1987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최규석 작가는 "나나 내 가족들에게는 좀 큰 규모의 데모일 뿐이었던 것 같다"고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합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룬 책들을 통해 우리 나라에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고 알았을 뿐입니다.

최 작가가 처음 이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선뜻 수락하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깊이 있게 체험한 역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만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어 학습 보조교재로 사용된다는 점 때문에 어렵게 수락했다고 하네요. 이 덕분에 새로운 정부와 함께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2017년 촛불 시민의 일원인 저도 1987년 시민들의 목소리에 공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삶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느 날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다."(작가의 말 중에서)

최규석 작가의 말은 17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부정한 대표자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대표자를 뽑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조금씩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87년 6월 항쟁에서 시민들이 피흘리며 얻어낸 것을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들이 낚아채갔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보통사람들을 민주투사로 만들다

만화책 <100도씨> 한 장면.
 만화책 <100도씨> 한 장면.
ⓒ 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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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선 '영호'라는 청년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반공소년이었던 영호. 장남으로 가족과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영호의 형 영진. 보도 연맹 사건으로 엄마를 잃고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던 아픈 역사를 살았던 영호의 어머니. 공부를 잘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영호의 누나. 반공소년이었던 막내 아들 영호를 자랑스러워하던 영호의 아버지.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네 가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십 년을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보내왔던 대한민국의 보통 가족들의 삶이 영호네 가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꼬마 반공소년 영호는 성장해 대학생이 되어 소위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무자비했던 군사정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일삼았고, 이에 맞서 저항하는 학생들도 돌과 화염병 등으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영호도 여느 대학생들처럼 당시의 불의한 권력과 그들의 폭력에 맞서는 편에 서게 됩니다. 어느 날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정부는 대규모로 학생들을 잡아들입니다. 영호도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운동권 학생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시 정부는 수많은 학생들을 잡아들여 잔혹하게 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곤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꾸며 다양한 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요즘에도 여전히 그렇기는 하지만 80년대엔 북한 혹은 공산당 이야기만 꺼내면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한 사람들은 치를 떨며 이성을 잃곤 했습니다. 전두환 군부는 이런 점을 이용해 저항하는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습니다.

자식이 명확한 이유도 없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부모와 가족들이 나서서 싸우며 당시 정권에 항의하는 적극적인 시위자가 되기도 하고,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하에서 약화되기만 하는 학생운동 조직을 다시 세우기 위해 게릴라식 시위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앞세운 시위 진압 세력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지리하게 이어지는 학생운동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며 동력을 잃어가는 듯 했습니다.

물도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의 과격한 투쟁 정도로 여겨졌던 반독재 운동이 전국민적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도화선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한 줄로 대표되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조작이었습니다.

권력에 의한 살인 사건을 숨기고 넘어가려는 정권에 국민들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후 감옥에 있는 영호 학생과 다른 선배 수감자의 대화가 당시 투쟁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영호 학생. 그렇게 슬퍼만 하는 것도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슬퍼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겁니다."
"뭐가 두렵단 말인가?"
"끝이 없을 거 같아서요. 처음 그 사람들 만났을. 때는 그 열정에 반해서, 그런 사람들이라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직이 깨지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어갈 때도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요. 정말 이길 수 있는 건지. 끝이 있긴 있는 건지."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보면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그렇다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남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수십 년을 버텨내셨습니까?"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나. 다만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99도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나. 허허허."(91-93쪽)

백지 한 장을 얻은 촛불 시민들, 무엇을 그려나갈까?

1987년 초부터 서서히 온도가 오르던 대한민국 시민들도 87년 4월 전두환의 개헌 논의 중단 및 후계자 지명계획 발표,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성명 발표 및 학생들의 비폭력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경찰들의 진압 등을 통해 결국 100도씨에 이르며 끓어올랐습니다. 끊이지 않는 평화 시위로 결국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를 내세우고 항복을 선언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얻은 것을 최규석 작가는 '소중한 백지 한장'에 비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빼앗긴 젊은과 생명들. 우리는 그것의 댓가로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장이었습니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말입니다."(169-170쪽)

2017년 촛불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또 다른 백지 한장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구현이라는 시민들 공통의 염원을 담아 얻은 이 백지 한장에 2017년 그리고 2018년의 대한민국 시민들은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자기편을 늘려 머릿수 싸움만을 해오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정치로 나아가는 밑그림이 그려지기를 바라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창비(2009)


태그:#6월 민주항쟁, #민주화운동, #민주주의, #전두환,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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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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