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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아버님 식사부터 하세요, 그동안 제가 가방 싸고 있을게요."
"그럴까?"

그는 가방을 잠그고 두 걸음 옮기더니 다시 돌아서서 가방을 연다. 약봉지와 수건, 칫솔, 치약. 이 4가지를 손가방에 '넣다 뺐다'를 무한 반복 중이다. 종이로 된 약봉지는 너덜너덜해졌다.

내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식탁을 향한다. 잠자코 따라오던 그는 "가만 있어봐라 가방을 아직 안 쌌는데 가방부터 싸야 겠다"며 내 손을 놓고 돌아선다. 한 시간 전에 차려놓은 밥은 이미 식었다.

어제는 혈압이 높아서, 오늘은 소변이 안 나와서, 매일 다르고 또 비슷한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러 갈 준비를 한다. 용케 '가방 싸기'가 끝나서 출발해도, 도중에 그는 집에 뭘 두고 왔다며 다시 집에 가자고 채근한다.

"뭘 놓고 오셨어요? 일단 병원부터 가시고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냐, 내가 가야해. 빨리 차 돌려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강박이 생긴다. 말을 제때에 들어주지 않으면 불안이 커져서 화로 바뀌고 결국 큰 소리가 난다. 그는 94세 나의 시아버지이다.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강박이 생긴다. 말을 제때에 들어주지 않으면 불안이 커져서 화로 바뀌고 결국 큰 소리가 난다. 그는 94세 나의 시아버지이다(자료 사진).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강박이 생긴다. 말을 제때에 들어주지 않으면 불안이 커져서 화로 바뀌고 결국 큰 소리가 난다. 그는 94세 나의 시아버지이다(자료 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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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4월 시어머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는 안산에서 소래포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젓갈을 사 와서 김치를 담글 만큼 건강했다. 배추 몇 포기에는 고춧가루가 몇 컵, 젓갈이 몇 컵, 다진 마늘이 몇 컵이 들어가는지 알았고, 부엌일이 끝나면 행주를 삶아 베란다에 너는 걸로 마무리했다. 차로 5분, 걸어서는 15분 거리에 사는 우리 집에 김치전을 부쳐 산책 겸 배달도 오셨고 공부하는 손자들 먹으라고 딸기를 사오기도 했다.

그녀가 운명을 달리 한 이후 그는 급격히 정신건강이 나빠졌다. 생활비를 찾으러 간 은행에서 1000원짜리로 150만 원을 찾아 신문지로 둘둘 말아 들고 온다. 깜짝 놀란 딸이 '만 원짜리로 10만 원만 찾아오면 되는데' 하며 부랴부랴 통장과 돈을 들고 은행으로 다시 입금하러 간다.

머쓱해 하시던 아버님은 딸이 문 닫고 나간 지 5분도 안 돼서 전화를 한다.

"너 왜 내 통장이랑 돈을 훔쳐갔니? 빨리 갖고 와."

화가 단단히 났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없다. 은행 가서 본인이 직접 입금해야 소란이 멈춘다.

지난 추석, 우리 집에서 식사 도중 화장실 다녀온 후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여기가 어디냐고 내게 묻는다. 셀 수 없이 다녀간 이곳을. 남편의 눈꼬리가 경직되는 걸 본다. 남편은 '연세가 있으시니 이럴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막상 받아들이기 버거워 한다.

이럴 때면 나는 두 사람을 동시에 간호해야 한다. 그를 향한 숨은 애정의 크기만큼 속상한 남편의 언짢은 소리가 불쑥 튀어나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의 어깨를 두 번 토닥인 후 재빨리 그에게로 가 그의 팔짱을 끼며 "아버지, 제가 청소를 너무 깨끗이 해서 다른 집 같죠? 어서 식사마저 드세요" 하며 식탁 의자에 그를 앉힌다.

밤에 잘 때도 한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닌다. 낮잠도 없다. 분리불안도 점점 심해져서 혼자 있을 때는 전화기를 붙잡고 산다. 도우미 분이 있어도 소용없고 자식들 중 누군가 와야 멈춘다. 다행히 그의 근처에는 그의 세 딸과 내가 있다. 우리가 돌아가면서 그를 돌본다.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

나는 휴직 중인 간호사다. 대학 동기 중 보건소 치매센터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상태를 얘기하고 상담을 받았다. 친구는 대개의 경우 간단한 인지능력 검사를 한 후 이상이 있으면 MRI도 찍고 진단이 확정이 되면 치매 치료약인 '뇌 혈류 순환 개선제'를 처방받게 된다고 했다. 약을 복용하면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했다.

내켜하지 않는 그를 설득해 보건소에 치매검사를 받으러 갔다. 보건소에 가는 날. 새벽 6시부터 샤워를 마치고 밥을 먹고 옷을 챙겨 입은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검사하는 동안 긴장한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도 또박또박 잘했다.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그에게 '정신만 바짝 차리면'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그 순간에 그는 아주 정상이었고 그렇게 진단이 내려졌다. 초기 인지장애의 경우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기대했던 약은 받지 못했다. 그는 안도했고 같이 간 딸은 걱정스러워 했다.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인지검사 문진표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인지검사 문진표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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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에서 실시하는 인지능력검사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인지능력검사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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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불행 중 다행스러운 건 그가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거다. 아내를 갑자기 보낸 그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날마다 그녀를 보낸 그날을 복기하며 후회스러워 했다. 모든 대화는 '기승전그녀'로 귀결되었다.

밤마다 그녀의 베개를 꼭 옆에 붙이고, 그녀의 베개에 말을 걸고 그랬던 그가 그녀에 대한 기억마저 깜빡깜빡 하더니 이제 더 이상 그녀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녀의 부재에 대한 고통이 그녀의 기억조차 지운 것인지 그는 거짓말처럼 그녀를 잊었다. 가족 누구도 그녀에 대한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행여라도 기억이 살아나서 그의 눈가가 다시 짓무를까 봐.

잊어버리라고, 다 잊어버리고 살라고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나는 매일매일 안타깝고 당황스럽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나는 매일매일 안타깝고 당황스럽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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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습을 보며 치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각해 본다. 혹시 본인에게는 축복,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재앙이지 않을까? 그토록 그를 힘들게 하던, 잔인하도록 사무치는 그리운 기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가 대신한다.

우울하던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는 걸 싫어해 전화도 자제하던 그가 지금은 자식들이 가끔 전화기를 꺼놓을 정도로 집요하게 전화를 건다. 안 받는다고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기억조차 못 하니까. 가끔 "이렇게 오래 사는 게 고통이다"라고 하실 때도 있지만 조금만 콧물이 나와도 병원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아이처럼 좋아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 사람들이 떠나간다. 부모가, 배우자가, 친구가, 더러는 자식이 먼저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 모든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산다면 그야말로 사는 건 지옥이 될 텐데. 그래서일까? 그렇게는 살 수가 없으니 잊어버리라고, 잊어버리고 살라고 치매가 오는 건 아닌지.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나는 매일매일 안타깝고 당황스럽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그가 모든 걸 잊은 듯 천진한 얼굴로 순댓국이 먹고 싶다고 할 때, 단풍이 예쁘다고 감탄하며 무릎 아픈 것도 잊고 단풍놀이 가자며 조를 때, 우울하게 앉아 있는 대신 뭔가를 집중해서 반복하는 것이 운동이 될 때가 그렇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 갈비탕 좀 사다줄래?" 나는 시계를 흘깃 보며 "네" 답한다. 곧 있으면 아들이 밥 먹으러 올 시간이다. 시간이 촉박하니 불편한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얼마 전 본 영화에서 소년이 노승에게 한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나는 서둘러 갈비탕을 사러 간다.


태그:#주간애미, #명랑한 중년, #치매, #시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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