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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화폐 발행 권력이 중앙은행의 손에 넘어갔을까? 비단이나 쌀로 물물교환을 대신하던 시절에 정부는 비단이나 쌀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았다. 귀금속이 아니면서도 통제를 받던 현물 화폐는 아마도 소금 정도였을 테지만, 통제의 정도는 전매권 수준에 머물렀다. 금과 은은 귀금속이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나마 중국의 은본위제가 아니었다면 남미 대륙에서의 은 수탈은 그렇게 지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권신수설이 판을 치고 있을 때 중상주의 학자들이 귀금속의 양을 국부라고 정의하자, 이제 왕실이 직접 금은을 통제할 이유가 생겼다. 중앙은행의 등장이다.

하지만 중앙은행을 오늘날의 슈퍼히어로로 만든 것은 케인즈다. 자본주의 경기 변동을 정부가 그냥 손 놓고 바라만 볼 게 아니라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정부에게 재정정책과 더불어 통화정책을 주문했다. 세계 모든 나라 정부의 경제 관료는 기본적으로 케인지언이다. 케인지언이 아니라면 통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공식에 맞추어 통화량 증가속도나 재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성미에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제국에서 한갓 종이쪼가리인 어음이 통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지만, 비실물화폐는 인간의 창의성 목록에 기본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미크로네시아 얍(Yap) 섬 사람들은 커다란 돌 바퀴를 통화로 사용하는데, 거래할 때마다 돌 바퀴를 굴리고 다니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서 종이 쪽지를 대신 사용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2미터짜리 돌 바퀴는 갑돌이 것이고, 모래사장 동쪽에 있는 3미터짜리 돌 바퀴는 을순이 것이라는 식으로 적어 놓는 것이다. 심지어 몇 해 전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린 5미터짜리 돌 바퀴도 통용된다. 그런데 이 돌 바퀴 소유 상황을 정리하는 사람은 이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도 중앙은행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거래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돌 바퀴 소유권이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넘어갔는지를 전부 자기 수첩에 기록한다면 어떨까? 소유 상황을 한 사람이 관리할 때는 조작이 쉬웠지만, 이제 조작을 하려면 마을 사람들 수첩을 전부 고쳐 써야 한다. 회계 부정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다툼은 다수결로 결정한다. 이것이 블록체인이다.

사이퍼펑크 선언서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비트코인을 금과 비교하고 싶어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튤립에 비교한다.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비트코인을 금과 비교하고 싶어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튤립에 비교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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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의 공동저자인 마이클 케이시와 폴 비냐는 비트코인이 현재 은행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더 나아가, 우리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혁신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트코인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블록체인을 활용한 통화, 소위 암호화폐를 널리 사용하여 프라이버시를 강화하고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이끌어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이퍼펑크(Cypherpunk)라고 한다. 개혁 대상 1호는 중앙집권적 통화 시스템이다. 사립 은행들의 집합체인 연방준비위(Federal Reserve)가 미국 달러의 공급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저들의 주장도 사리에 맞다. 금융시스템은 애초에 거래의 편리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공공 서비스인 통화 시스템에서 사익을 편취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어찌 정당화될 수 있나.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생길 법도 하다.

중국은 얼마 전에 비트코인의 위안화 인출을 금지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각지의 컴퓨터에 기록되어 있는 분산원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2013년, 러시아 부호들의 채권 회수로 인한 뱅크런에 직면한 키프로스 정부는 국내 은행의 예금 자산을 동결하고 그중 10%를 몰수해 긴급 금융구제에 사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 세계는 이 대담한 조치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예금 인출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내 돈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것이다. 비트코인이라면 절대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비트코인의 '가치 명제'가 명확해졌다. 정부는 당신의 은행 계좌에서 돈을 인출할 수 있지만 당신의 비트코인을 건드릴 수는 없다. (160-161쪽)

말리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지만, 사람들은 대개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 지선 전화 단계를 건너뛰고 휴대전화 단계로 넘어간 사례는 아프리카에 아주 많다. 설립하고 유지 관리하는 데 있어, 휴대전화 인프라가 오히려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말리에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 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다. 그러나 비트코인이라면? 피처폰의 문자메시지 기능을 이용하여 비트코인을 주고받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벤처기업 37coins는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영 실패로 위기에 빠진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국민연금이 동원된 사례가 아주 많은데, 중국에서는 더한 모양이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예금 금리도 아주 짜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비트코인이 저축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블록체인이 처음부터 강조한 기능은 해외송금이다. 해외송금에 최적화된 리플이라는 가상화폐도 존재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이민자들의 본국 송금 규모는 약 5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약 2000억 달러 규모의 추적되지 않는 송금을 제외한 규모다. 이에 비하면, 선진국의 개발도상국 원조 금액은 125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이민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송금 수단인 유니온페이는 최대 11%의 수수료를 매긴다. 가상화폐가 가장 먼저 침투할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은행 인프라가 부실한 케냐에서는 한 벤처 업체가 자신만의 고유 전자화폐를 이용해서 전국 1만 5천 개 지점을 통해 송금 업무를 처리한다. 문제는 전자화폐의 지급 보증을 위해 이 회사가 지점마다 쌓아 두어야 하는 현금의 양이다. 이 경우에도 비트코인을 사용하면 훨씬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된다.

더 나아가, 부동산 등의 소유권이나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공문서를 블록체인으로 구현하면, 위조나 분실의 위험이 거의 없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블록체인을 이용해서 조작이 거의 불가능한 전자 투표도 가능하다. 이미 에스토니아가 블록체인 전자 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비트코인의 미래는 어떨까? 불가사리는 다리를 자르거나 심지어 본체를 둘로 나눠도 살아남는다. 2000년대 초반 음악계를 호령하던 냅스터는 사라져 버렸다.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정부가 서비스 중단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서비스를 통제하던 본사의 영업중단으로 인해 냅스터 공유망은 사라져 버렸다. 반면 비트토런트는 살아남았다. 개인 대 개인으로 파일을 전송하는 이 서비스에는 중앙통제라는 개념이 없다. 분권적 구조가 비트토런트를 살린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비트코인도 살아남을 것이다.

누구도 불안정한 통화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돌바퀴도 훌륭한 화폐가 될 수 있다. 화폐가 되기 위해 실물 가치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안정적인 교환비율은 필요하다.
 이런 돌바퀴도 훌륭한 화폐가 될 수 있다. 화폐가 되기 위해 실물 가치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안정적인 교환비율은 필요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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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이클 케이시와 폴 비냐는 비트코인이 정말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반드시 살아남을 비트코인을 우리가 굳이 지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비트코인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가 사실은 믿음의 부족 때문은 아닐까?

비트코인이 화폐로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화폐의 기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비트코인은 가치의 저장이나 회계의 기준으로 쓰이기에는 너무 불안정하다. 거래의 매개수단으로 쓰인다고 주장할 만큼 거래에 활용되고 있지도 않다.

비트코인은 현재 투기 자산이다. 하루에도 가치가 20%씩 등락하는 일이 예사다. 힘들게 번 500달러를 본국으로 송금하여야 하는데, 송금받는 가족이 1,000달러를 받거나 또는 250달러를 받는 도박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유니온페이의 11% 수수료를 선택하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인간은 이익보다 손해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치가 급등락하는 자산이 쓸모있는 곳이 있다. 바로 파생금융상품 시장이다. 변동성이 어느 정도 있어야 옵션이든 선물이든 판돈이 커지는 법이다. 마침 시카고옵션거래소와 시카고상품거래소가 최근 비트코인 선물거래를 개시했다. 제도권 금융으로의 편입이 비트코인을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곡물을 베이스로 하는 파생금융상품들이 등장한 이후 곡물 가격의 급등락이 오히려 심해진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금융, 저렴한 수수료의 국제 송금, 정부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저축,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비트코인이지만 당장은 가치 안정화가 시급하다. 비트코인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일까? 지금의 광풍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양파로 오인하고 요리해 먹기 전까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튤립 구근이 한갓 식물 뿌리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

마이클 케이시.폴 비냐 지음, 유현재.김지연 옮김, 미래의창(2017)


태그:#비트코인, #가상화폐, #통화정책, #화폐의 기능, #안정적 환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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