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여빈.

배우 전여빈. ⓒ 필름있수다


100분의 상영시간에 등장하는 분량은 단 몇 씬. 그런데 이 배우의 표정과 눈빛이 영화 곳곳에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14일 개봉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아래 <미스터 모>)에 출연한 배우 전여빈이다. 단 2회 차의 촬영에 참여했을 뿐인데 그는 지방에 사는 젊은 청년의 어떤 외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영화는 불치병을 인지한 한 초로의 남성 모금산(기주봉)이 생전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던 아내를 떠올리며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신만의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는 줄거리다. 전여빈은 모금산이 사는 지역의 이웃 자영으로 분했다. 늘 혼자 다니고 타인의 부름에도 대꾸를 잘 하지 않는 모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종종 그와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인물이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

소재나 주제의식은 다소 진부할 수 있지만 <미스터 모>는 신파로 흐르지 않고 각 캐릭터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마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인생관을 투영한 듯 말이다. 영화 공부를 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린 아들,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를 자신의 동네로 불러들여 함께 단편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모씨는 그래서 마냥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자영이 품고 있는 정서가 큰 몫을 했다. 영화에서 장황하게 설명되진 않지만 젊은 나이인 자영 역시 왠지 모르게 쓸쓸하지만 동시에 따뜻함이 있다. 자영을 두고 모씨는 '외로운 사람'이라 표현했다. 이런 인물을 전여빈은 "자영은 서울에 있다가 지방으로 내려온 인물"이라 해석했다.

"지방에서 나고 거기에 계속 있었다면 친구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친구들도 다 서울로 떠났을 수도 있지만. 금산 아저씨가 말한 대로 자영은 외로운 사람이다. 근데 그게 마냥 부정적이지 않다. 서울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어떤 사정으로) 시골에 내려오게 됐고, 자의 반 타의 반 외로움을 가지고 그런 판에 박힌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어떨 때는 씩씩하게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한 장면.  전여빈의 모습이 보인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한 장면. 전여빈의 모습이 보인다. ⓒ 영화사 달리기


<미스터 모>의 자영을 설명하기 위해 앞서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된 <죄 많은 소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죄 많은 소녀>에서 전여빈이 맡은 영희는 책임질 수 없는 죄의식을 강요당하는 인물. 지독히 고독하고 괴로워하던 캐릭터(영희)와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캐릭터(자영)가 그 안에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 많은 소녀>로 전여빈은 올해의 배우상(2017 부산국제영화제)과 독립스타상(서울독립영화제2017)을 받았다.

"<죄 많은 소녀>가 죄책감이라는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서로에게 계속 전가하는 삶의 모습들이었다면 <미스터 모>는 너무 작지만 소중한 우리 삶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그가 설명했다.

어떤 매력

"2년 전에 <미스터 모>를 찍었고, <죄 많은 소녀>는 지난해 촬영했다. 두 작품 모두 오디션 제의가 있었다. <미스터 모>에선 감독님이 여러 역할을 열어 두고 절 보신 것 같다. 제 입장에선 근데 스데반과 예원(영화 속 주인공으로 모씨와 함께 단편 영화를 찍는 캐릭터들- 기자 주)의 모습보단 자영이 더 궁금했다. 오디션을 보는데 그날따라 제가 말이 많은 푼수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감독님에게 하고 있더라.(웃음) 추후에 감독님이 말하길 '배우 전여빈 뿐만 아니라 인간 전여빈 자체가 매력 있었다'며 어떤 역으로든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자영이라는 손님으로 초대 받아서 따뜻하게 촬영하고 온 기분이었다.  

<죄 많은 소녀>는 전체 시나리오가 아닌 여러 배역들의 대사와 지문이 있는 걸 받았다. 그리고 비디오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대사가 있으니 짐작은 했지만 이게 어떤 영화인지 유추하기가 굉장히 모호했다. 캐릭터마다 느껴지는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오디션을 보게 됐는데 그때 전체 대본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 궁금했다. 요즘 핸드폰으로 보기 쉽게 돼 있잖나. 그래서 읽어 가려는데 제 생각보다 글의 무게가 무거웠다. 그냥 넘기면 안 될 거 같아 제본소에 가서 정성스럽게 제본한 뒤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전 처음 대본 읽는 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감독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지 많이 궁금했었다. 감독님을 뵙고 그 얘길 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픔이나 죄책감이 있어도 잘 잊어낸다고, 그리고 스스로 잘 견뎠다고 변호하면서 살며 다른 사람에겐 스스로가 마냥 괜찮은 사람인양 산다고. 감독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얘길 했다. 감독님도 이 대본이 어떻게 나왔는지 얘기하셨고, 그렇게 세 시간 정도를 대화한 것 같다."

전여빈에겐 대본에 담긴 것 그 이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영감을 받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런 공감력 때문일까.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쓴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죄 많은 소녀>의 김의석 감독은 전여빈 캐스팅을 강하게 주장했다. 

특별한 꿈

 영화 <죄 많은 소녀>의 한 장면.

영화 <죄 많은 소녀>의 한 장면. ⓒ KAFA


2015년 영화 <간신>으로 데뷔한 3년 차 배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다들 늦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때였는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다. 데뷔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직후 전여빈은 현장 스태프로 일하며 영화와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전까지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중요한 기로에서 큰 전환점을 맞은 것.

"열아홉 때까진 의사가 되고 싶었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실패했다. 현실의 벽을 크게 느꼈다. 성적은 따라주지 않았고, 더 이상 공부할 힘은 없었다. 그때 본 영화 중 하나가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꿨던 의사가 될 수 없다면…. 그때 전 사명감을 느끼는 일을 찾고 싶었다. 왠지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목표 의식이 생길 것 같더라. 많이들 하시는 말이지만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찾고 있던 차에 영화를 만났다. 세상에 이런 멋진 걸 내놓을 수 있다면 후회 없을 것 같았다."

확고했던 꿈을 접고, 또 다른 목표를 찾은 이상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다(왜 의사가 되려 했는지 전여빈이 답했으나 개인사이기에 기사엔 싣지 않는다 - 기자 주). 가족에게 그는 '스물아홉 때까지 해보고 잘 안 되고 힘들면 다른 행복한 일을 찾아보겠다'는 선언까지 할 정도로 달렸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그런 과정을 거친 후 만나게 된 셈이다.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행복했다. 물론 어떤 순간은 마냥 행복할 순 없겠지만 연기가 참 재밌다. 잘 하고 싶어서 어렵지만 그 고민 하는 것도 재밌고, 고민하다보면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노력하면 재능도 생긴다고 믿거든. 진짜로. 사실 전 체력도 엄청 약해 밤도 못 새는데 현장에 있으면 밤새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다. 배도 잘 안 고프고(웃음). 저 혼자 하는 게 아닌 여럿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순간이지 않나. 그 순간에 간절해진다."

사람을 치유하고 싶었던 전여빈은 연기를 통해 치유 받는다. "연기하며 스스로 사랑하게 되니 타인도 사랑하고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더라"며 그가 환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꼭 물리적인 의사만이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배우 전여빈.

배우 전여빈. ⓒ 필름있수다


<미스터 모>를 빌려 전여빈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를 제외한 인생 영화 한 편을 물었다. 그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언급했다.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이 영화가 생각났다. 소외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충이 담겨 있고,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가 담겨 있다. 그 과정이 참 아프다. 남의 아픔은 멀리 있는 게 아닌 언젠가 우리에게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도 그렇잖나. 죽음은 늘 주변에 있다. 타인에게 죽음이 다가갔을 때 그걸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면 엄청난 파국을 느끼잖나. 

그런 아픔을 바라보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만 그치면 안 될 거 같다. 물론 공감하는 게 첫 번째 순서겠지만 그 다음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이상적인 말이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감하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 타인을 위하는 게 이게 결국 나를 위한 일인 것 같다."

배우로서 이제 출발선에 섰다. 전여빈은 "한 걸음씩 지금을 걷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치 글을 쓰듯" 그는 삶을 글쓰기에 비유하며 "함부로 걷지 않고 꾹꾹 한 걸음씩 지나온 날과 다가올 날을 생각하며 걷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 전여빈.

배우 전여빈. ⓒ 필름있수다



전여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기주봉 고원희 서울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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