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화순 사평장 풍경.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화순 사평장 풍경.
ⓒ 마동욱

관련사진보기


5일 만에 다시 열린 장터가 스산해 보인 까닭은 차가운 겨울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장은 이웃 화순장이나 능주장만큼이나 위세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주암댐이 만들어지면서 이웃 마을들이 수몰되기 전 얘기다.

1984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주암댐이 1991년 완공되면서 보성 득량만 등지로 흘러가던 사평천은 주암호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사평장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은 탯자리를 주암호에 묻고 고향을 떠나 타향의 이방인이 되었다.  

사평천을 비롯한 보성강 줄기에서 나는 다슬기는 품질이 좋았다. 한때 사평장 특산물로 과실인 배와 밤과 더불어 다슬기가 꼽혔다. 이 다슬기를 잡아 요리를 하던 식당도 덩달아 사평리의 명물이 되었다. 인근 광주나 순천 사람들이 다슬기수제비나 다슬기탕을 먹으러 사평을 즐겨 찾았다.

사평장은 매월 5일과 10일, 15일과 20일, 25일과 30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사평장이 사람들로 흥청거리자 노점 널브러진 자리에 양철지붕을 이은 점포가 만들어졌다. 양철지붕 아래 집집마다 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파란 연탄 불꽃처럼 장터를 수놓던 아름다웠던 꿈. 어떤 꿈은 꽃처럼 이뤄졌고, 어떤 꿈은 꽃처럼 피다가 지고 말았다. 그래, 다들 꽃 같은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양철 문들은 주인을 잃고 굳게 닫혀져 있다. 침묵하는 양철문 사이사이를 휑한 바람이 스르르 지나간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서늘한 바람. 양용만(61)씨는 약 40여 년 전부터 사평장에서 신발장사를 하고 있다.

시장과 장의 차이, 사평장

양철지붕으로 이은 사평장 점포들이 문을 닫은 채 길게 늘어서 있다.
 양철지붕으로 이은 사평장 점포들이 문을 닫은 채 길게 늘어서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약 40여 년 동안 시평장에서 신발을 팔고 있다는 양용만씨.
 약 40여 년 동안 시평장에서 신발을 팔고 있다는 양용만씨.
ⓒ 마동욱

관련사진보기


"한 십년 전부터 상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장을 떠나더니 이제 거의 다 떠나고 겨우 몇 집만 문을 열고 있제. 장사가 되고 안 되고는 둘째 치고 손님 자체를 보기 어려운 지경이야."

서늘한 바람조차 한가한 사평장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두 할머니가 장터 한복판에 서서 고함지르듯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감님 몸도 안 좋은디 교회나 모시고 가제 장엔 왜 나오셨소?"
"'심심하게 교회 가서 뭐 한다요, 장에 구경이나 갑시다'하고 영감 데꼬(데리고) 마실 나왔제."

사람들 거의 떠났어도 사람은, 사람이 그립다. 적막한 장터의 시간을 유쾌하게 채색하는 세월의 무게. 건조하게 얘기하자면, 시장(市場)은 특정 물건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매개로 만나는 곳이다. 사람들이 오가고, 관계를 맺는 공간으로서 의미보다는 '거래'의 의미가 더 크다.

하지만 장(場)은 다르다. 장을 떠올리면 '거래'보다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평장으로 마실을 온 까닭도 그리운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오일마다 찾아오는 지독한 그리움, 장터의 그리움은 퇴색하지도 않는다.

생선 좌판을 깐 부부는 동태를 팔았다.
 생선 좌판을 깐 부부는 동태를 팔았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또 하나, 사평장엔 아직 그대에게 선물할 게 많이 있다. 그대와 옛날 왕사탕을 달달하게 빨며 산보하고 싶다. 그대에게 따순 털신 한 켤레 안기고 프러포즈하고 싶다. 국밥 한 그릇에 사평 막걸리를 따르며 나의 사랑이 얼마나 진솔한지 고백하고 싶다.

마침내 그대가 내 사랑을 받아들이면, 닫힌 양철문에 그림을 그릴 것이다.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사랑의 그림. 보기만 해도 오져 죽을 행복의 그림. 그렇게 마침내 이뤄진 사랑들로 사평장이 북적거릴 날이 머지않았다.   

두 개의 연못을 둔 정자 임대정

임대정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임대정 바로 앞에 있는 연못에 있는 섬엔 대나무가 있다.
 임대정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임대정 바로 앞에 있는 연못에 있는 섬엔 대나무가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임대정 앞 연못엔 '세심'이 새겨져 있다.
 임대정 앞 연못엔 '세심'이 새겨져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사평로를 따라 임대정 원림(臨對亭 園林)으로 향한다. 임대정은 이름 그대로 '물가에서 산을 대한다'는 뜻이다. 봉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사평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정원을 가꿨다. 정자 맞은편엔 대나무숲이 깊고, 주위로 소나무·매화나무·살구나무·석류나무·측백나무·배롱나무·은행나무가 은하수처럼 어우러져 있다.

임대정은 독특하게 연못이 두 개나 있는 정자다. 정자 아래쪽에 있는 연못엔 두 개의 섬이 있다. 섬엔 배롱나무 비스듬하게 서있다. 이 겨울 지나고 봄 지나 여름이 오면 백일 동안 지지 않는 꽃이 필 것이다. 사랑의 꽃, 백일홍(百日紅).

정자 바로 앞에 있는 연못에도 섬이 하나 있다. 섬 가운데에는 대나무가 푸르고 섬돌에는 '세심(洗心)' 두 글자가 뚜렷하다. 마음가짐 깨끗하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라는 의미다. 그윽한 풍광을 즐기되 줏대 없이 취하지는 마라는 회초리다.

두 개의 연못이 있다는 건 두 개의 강이 있다는 것이다. 동양의 사유에서 두 개의 강은 곧 두 개의 우주다. 광활한 우주, 작은 점 하나같은 지구에서 우리는 만났다. 어느 바람에 스치는 먼지인 줄 모른 채 우리는 헤어졌다. 이토록 광활한 우주에서, 이 아득한 시간 속에서 오로지 그대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의 가슴 속 연못에 사는, 작은 별이었는지 모른다. 그리울 때 언제고 품을 수 있는 연못 속 작은 별. 그래서 그대는 그토록 초롱했던 것인가. 임대정 연못에 별이 떠오른다.  

임대정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아래 연못엔 섬이 두 개 있는데 한 섬에 배롱나무가 있다.
 임대정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아래 연못엔 섬이 두 개 있는데 한 섬에 배롱나무가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태그:#사평장, #임대정, #화순여행, #다슬기, #주암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