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7년 12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전례 없었던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 일명 '검은 재앙의 늪'으로 불렸던 '태안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태안에는 전국에서 모인 123만여 명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닿았다. 올해 서른의 끝자락에 선 최유리(30)씨도 그 현장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지난 11월, 10년 만에 그녀는 태안군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가 자원봉사 했던 시기는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이나 지난 상황이었어요. 교회 사람들과 같이 태안 앞바다로 향했죠. 당시 태안 상황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어요. 하얀 백사장은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죠."

최유리씨는 10년 전 태안군 앞바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2008년 2월, 그녀는 대학교 입학을 앞둔 파릇한 신입생이었다. 여리고 고운 손으로 검은 기름에 푹 젖어있던 모래를 하나하나 퍼다 날랐다. "사방을 뒤덮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머리가 몽롱한 상태에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만리포까지의 여정은 짧지 않았다. 서울에서 태안버스터미널까지 약 세 시간을 탄 후, 시내버스를 타고 50분 정도를 더 가야 비로소 만리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고 설렌다"는 최유리씨, 그녀는 만리포에 첫 발을 디디자마자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와, 여기가 정말 태안 앞바다 맞아요?"

태안 앞바다의 별불가사리
▲ 만리포 해수욕장 태안 앞바다의 별불가사리
ⓒ 최상관

관련사진보기


만리포 해수욕장의 갈매기떼
 만리포 해수욕장의 갈매기떼
ⓒ 최상관

관련사진보기


기름을 시커멓게 뒤집어 쓴 갈매기와 지천에 널려있는 바다 생물 시체. 그녀 기억 속의 태안 앞바다는 죽음의 바다였다. 10년 만에 이곳을 찾은 최유리씨의 눈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백사장을 뒤덮은 갈매기 떼였다. 비단고둥, 망둥어, 별불가사리 등도 눈에 띄었다.

누가 검은 바다를 살렸는가

10년 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는 자연재해에 비견할 만한 최악의 해상 사고였다. 오늘날 기적적으로 태안이 살아나기까지는 123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전국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징탑 '희망의 고리'(왼쪽)와 찬양시비(오른쪽)
 상징탑 '희망의 고리'(왼쪽)와 찬양시비(오른쪽)
ⓒ 최상관

관련사진보기


태안 앞바다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거대한 고리 세 개로 만들어진 웅장한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태안 복구에 기여한 자원봉사자와 국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세워진 상징탑, '희망의 고리'다. 그 옆에는 시인 박동규의 시가 새겨진 찬양시비도 있다.

마음 한가운데 용광로 안에서
숭고한 희생의 꽃들이 바닷가에 피어 있다.
그 고마움 바다처럼 영원하리라.


시인 박동규의 '누가 검은 바다를 손잡고 마주 서서 생명을 살렸는가' 中

'희망의 고리'와 찬양시비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가니 기념관이 눈에 보였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올해 9월 개관했다. 사고로 고통 받았던 지역주민들의 삶, 추위와 악취를 녹인 따뜻함을 보여준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었다. 악몽에서 기적을 피워내기까지 과정을 시간의 순서대로 따라가며 간접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김병철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있는 정영구 씨를 비롯한 부여군 주민
 김병철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있는 정영구 씨를 비롯한 부여군 주민
ⓒ 최상관

관련사진보기


자원봉사를 위해 세 번이나 태안을 방문했던 정영구(66)씨도 오랜만에 태안을 찾았다. 부여군에 사는 정영구씨는 당시 마을 부녀회장으로서 동네 주민들을 이끌고 자원봉사에 몸소 뛰어들었다. 충청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녀가 말했다.

"아휴, 말도 못하쥬. 썰물이 나가고 나면 하루 50여 개 돌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아 냈어유. 그랗게 닦아 내도 밀물이 들어오면 도로 시커멓게 변해서 미칠 노릇이었쥬. 완전히 회복돼서 이렇게 다시오니 뿌듯하고 좋네유."

기념관에는 나이가 지긋한 한 남성이 방문객들을 정성스레 안내하고 있었다. 기념관의 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김병철씨다. 그는 태안군민으로 이 곳에 오랫동안 살아왔다. 사고 당시 유통업 종사자였기에 어민들만큼의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주민의 75%가 어업에 종사하는 태안군의 특성상 지역경제 전반이 무너지면서 결국 그의 생계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러나 태안은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을 통해 빠른 회복세를 탔고, 사고 이후 7년 만에 사실상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어려웠던 그의 삶도 차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에게 소회를 물었다.

"고맙죠. 98년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등으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국민의 저력이 2007년 태안 앞바다에서도 확인된 셈이죠. 공식집계된 자원봉사자 수가 123만여 명이지 실제로는 150만 명은 족히 될 겁니다. 이 기념관을 통해 현재 세대는 경각심을 가지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기념관에서 체험할 수 있는 공감각적 경험을 통해 큰 교훈을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을 지는 태안 앞바다. 서핑보드 타는 사람들
 노을 지는 태안 앞바다. 서핑보드 타는 사람들
ⓒ 최상관

관련사진보기


10년의 산고 끝, 다시 태어난 생명의 바다

제법 쌀쌀한 늦가을의 날씨인데도 적지 않은 인파가 태안 앞바다에 모였다.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백사장을 걸으며 노을을 즐기고 있었다. 서핑보드를 타는 무리들도 눈에 들어왔다. 어림잡아 30여 명은 돼보였다.

서핑보드를 옆에 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전에서 온 김창섭(35)씨는 매년 바다를 찾는 서핑보드 매니아다.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동해에서 서핑을 즐겼다. 이번에는 만리포를 찾았다. 걱정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걱정이 없지는 않았어요. 막상 와보니 동해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바다색깔이 맑고 푸르네요. 거리도 가까우니 앞으로는 자주 올 생각입니다"라며 기쁘게 말했다.

태안 앞바다와의 10년 만의 조우, 그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서울로 떠날 시간. 검은 기름띠의 파도, 모래에 검게 묻어나오던 기름덩어리,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태안 앞바다는 달라졌다. 백사장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 붉은 노을과 잘 어울리는 푸르름이 우리를 맞이했다. 노을 지는 태양을 배경으로 갈매기가 떼지어 날아가는 절경을 이루어내기도 한다. 태안 앞바다는 기나긴 산고 끝에 생명의 바다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7일,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어느 덧 1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날 태안 앞바다의 모습을 전합니다.



태그:#태안, #만리포, #유류피해극복기념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세요. 정치, 사회,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은 청년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