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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클럽에 갔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정해놓은 횟수만큼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돌아선 순간, 심장이 '쿵'소리를 내며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석상처럼 굳어져 바라본 곳에는 한 노인의 뒷모습이 있었다. 트레드밀 위에서 일정한 동작으로 워킹을 하며 앞쪽의 TV를 응시하고 있는 노인. 영락없는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 박자에 맞춰 걷는 모습 하며 벗어진 머리, 약간 젖혀진 앞이마.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버지는 가까이 갈까 말까 망설이게 하는 혼란스러운 존재였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어낸 세대의 강인함과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단단한 사고는 어린 딸을 품어 주기엔 너무 거친 울타리였나 보다. 그 당시에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며 대하는 남존여비의 생각들이 일반적이었고, 아버지 역시 그런 사고가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한 분이셨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별 의문 없이 자라났지만 유일한 딸이었던 나의 마음속에서만큼은 왠지 모를 억울함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소연할 곳 없는 어린 내 마음은 엿가락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나의 어린 시절을 내내 춥고 외롭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사춘기. 펄펄 끓는 반항심과 넘치는 호르몬으로 예민하기 이를 데 없던 나는 그런 성정을 억누르고자 하는 강압적인 아버지와 그야말로 '대전쟁'을 치렀다. 며느리도 아니면서 눈 감고 입 닫고 귀 막고 살아온 오랜 세월에 대한 피해의식이 똘똘 뭉쳐져 가슴을 짓누르니 이를 좀 알아달라고 하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얌전하고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며 모범적이었던 딸의 '막가파식 쿠데타'에 아버지도 적잖이 당황하시고 속도 많이 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며 우리는 한동안 냉랭했고, 끝내는 각자 옆에 조그만 원망의 무덤을 만들고 덮어 버렸다.

부모는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온 우주요, 세상이다. 처음 배우는 교과서요, 선생님인 부모의 영향은 참으로 막대해 죽을 때까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반면 사람들은 때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인생의 한 단계로 부모가 된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새롭게 탄생하는 것으로 비유할 만큼 크고 중요한 일임에도 대부분은 특별한 준비 없이 부모가 되고 아이를 키운다. 어찌 보면 가슴 떨리게 무서운 일이다. 지금은 부모가 되기 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모교실에도 다니고 아이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키우기 위한 고민도 많이 하는 듯하다. 변하지 않으면 교육관과 양육방식이 개선 없이 대대로 이어질 것이고 시대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의 기준이란 오래 내 곁에 남아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국에는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의 기준이란 오래 내 곁에 남아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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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식도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칠십 중반에 돌아가셨고 나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를 믿을 수 없어 2년을 방황하며 괴로워했다. 결국에는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의 기준이란 오래 내 곁에 남아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살다 보면 모순되는 감정들과 상충되는 시각들을 모두 껴안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의 혼란스러움과 원망, 외로움은 중년의 내 안에도 여전히 위로받고 싶은 마음으로 오롯이 남아있다. 다 커서 지혜로워진 나는 여리고 상처 입은 내 안의 아이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 주며 말한다. 외로워하지 말라고. 아버지도 아버지의 방식으로 너를 사랑하신 거라고.

오늘도 나는 헬스클럽에 간다. 아버지를 닮은 노인의 뒷모습이나마 엿보고자, 그리움을 달래고자. 그리고 나에게 특별해진 그분이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빌어본다.


태그:#그리움, #아버지, #부모되기, #사랑, #헬스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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