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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10월 초, 딸은 조리원에서 퇴소했고, 갓난쟁이 손자도 마침내 제집으로 돌아와 안식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매일 계속되는 혈변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1주일 남짓 중환자실을 거쳐야 했던 손자가 전쟁에서 끝내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손자의 귀가로 인한 안도감은 딱 하루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또 혈변을 본 거였다. 사위는 이런 사실을 식구들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 나한테만 알렸다. 제 처까지 합해 모두 세 사람만이 혈변의 재발을 알게 됐다.

퇴원 직후 손자가 집에서 잘 노는 모습을 2분 정도 되는 동영상으로 찍어 식구끼리 공유했다. 포항의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 서울의 고모, 공주의 외가 식구들, 미국의 외삼촌까지 그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즐거워했다.

우리 집에 거미줄이 많은 이유

손자의 윗입술 한 가운데 인중 밑으로 난 옹이. 부드러운 살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니 젖먹는 일, 즉 생존이 간단치 않다는 뜻일 게다.
 손자의 윗입술 한 가운데 인중 밑으로 난 옹이. 부드러운 살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니 젖먹는 일, 즉 생존이 간단치 않다는 뜻일 게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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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사람, 손자의 외할머니만은 예외였다. 동영상 가운데 2, 3초 손자가 찡그리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여보 우리 손자 정말 괜찮은 거예요? 잠깐이지만 찡그림이 그냥 아픈 모습이 아니던데요."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정색을 하며 추궁했다.

"애들 말로는 괜찮데요. 잘만 논답니다. 신경 좀 끄세요. 이러다 당신이 병나겠어요."  

혈변이 또 시작된 걸 알면서도, 아내에게는 잡아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아침 밥상머리에서도, 점심에는 문자로, 자기 전에도 서너 차례, 하루 예닐곱 번씩 손자가 정상인지를 물어왔다. 2, 3일 계속 그러기에 사나흘째 되던 날에는 약간 화를 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도 했다.

아내에게는 연막을 피우는 한편, 하루에도 네댓 번 사위와 딸에게 손자의 변 상태를 물어봤다. 혈변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이튿날까지 계속됐다.

손자와 망울이의 아침 인사. 성격이 까칠한 망울이는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서는 예외 없이 맹렬히 짖어대곤 한다. 그러나 신생아 손자는 첫날부터 부드럽게 맞았다.
 손자와 망울이의 아침 인사. 성격이 까칠한 망울이는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서는 예외 없이 맹렬히 짖어대곤 한다. 그러나 신생아 손자는 첫날부터 부드럽게 맞았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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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우유 같은 거 먹은 적 있어? 요구르트도 먹지 마. 유제품은 일단 손도 대지 말고, 콩 같은 음식도 끊으라고 해. 이틀만 더 지켜보고 이상 있으면 그땐 응급실 가도록 하자."

"네, 장인어른. 그런데 장모님은 애가 안 좋다는 걸 어찌 아셨을까요? 애 엄마도 저도 너무 놀랐어요. 신기가 있으신 걸까요?"

"나도 솔직히 놀랍고 뜨끔했다. 어쨌든 중환자실에 또 입원하게 되면 나는 죽었다. 더 이상 혈변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야 할 텐데…"

딸은 이른바 자연주의 출산을 했다. 제왕절개나 무통분만 같은 걸 원칙적으로 하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과 아이의 힘만으로 출산했다. 비교적 순산이었다. 극심한 본격적 산통은 4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4시간에 걸쳐 수십 센티미터에 불과한 산도를 기어 나와야 했던 손자는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 엄마 피를 꽤 많이 먹기도 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혈변의 원인을 자연분만에서 찾으려고도 했지만, 그다지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만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자연분만에 대해서는 여전히 막연하지만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딸의 자연분만 선택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길이었을 수도 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인 까닭이다. 우리 집 방 구석구석에는 거미줄이 적지 않다. 자연을 존중하는 아내가 거미가 밥을 굶지 않도록 일부러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기도 파리도 나는 아내가 없거나 안 볼 때 틈을 타 때려잡곤 한다.

출산한 딸이 손자와 함께 시골집을 방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울이는 가상 임신 조짐을 보였다. 이불을 돌돌 말아 굴처럼 만들고 얼마쯤 지나서는 젖도 흘러 나왔다. 우연치고는 신기했다.
 출산한 딸이 손자와 함께 시골집을 방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울이는 가상 임신 조짐을 보였다. 이불을 돌돌 말아 굴처럼 만들고 얼마쯤 지나서는 젖도 흘러 나왔다. 우연치고는 신기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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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살아있는 모든 걸 대하는 마음이 사뭇 경건한 축에 속한다. 자연과 생명을 대하는 마음이 남다른 편인 까닭에 아내는 2, 3초에 불과한 손자의 찡그림 얼굴 동영상을 보고 나 같은 사람은 간파해내지 못하는 어떤 이상을 포착해 냈을 수도 있었다고 추정해본다.

대략 10년 전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창한 목표 아래, 시골에서 '귀연생활'을 시작한 내 경우, 말하자면 무늬만 자연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속 다르고 겉 다를망정, 삶은 자연을 닮은 게 가장 좋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하다. 중환자실 신세를 진 손자를 앞장서서 키워보겠다고 할 때도 큰 틀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내 입장에서는' 자연주의 육아였다.

작위를 최소화하고, 내 본능에 최대한 충실하게 키워보자는 거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손자를 항상 진심으로 대하면 저절로 육아법은 습득될 것이며, 손자는 결국은 잘 자라게 될 것이라는 나만의 믿음이 있었다.

육아의 답, 양육자는 알고 있다

손자가 서울에서 시골의 내 집으로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육아에 대한 내 생각을 강고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항상 나와 아내 사이에서 잠을 자는 2년생 반려견 망울이의 젖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잭 러셀 테리어 계통으로 짐작되는 망울이는 감성이 뛰어난 개다. 20미터쯤 밖에서 나는 미세한 냄새도 맡을 정도로 후각이 예민하고 귀도 기가 막히게 밝다.

물론 이 녀석의 '상상 임신' 증상을 출산, 그리고 딸과 손자의 우리 집 체류와 연계시킬 과학적 근거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불을 돌돌 말아서 (새끼를 키울 요량으로) 굴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실제로 젖도 흘러나오는 게 상상 임신만큼은 확실하다.

개가 주인이 임신하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증언'은 인터넷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일부 동물행동학자들은 임산부 특유의 체취 같은 걸 느껴서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손자가 자지러지게 울 때 망울이는 안절부절 당황한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평소 매우 공격적인 망울이가 신생아 손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적과 아군을 유별나게 구별하는 망울이가 어떻게 손자를 식구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개가 아니더라도, 특별히 교육받지 않아도 세상의 어미들은 본능적으로 새끼에게 최선의 케어를 해준다. TV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지만, 때로는 눈물겨울 정도로, 또 때로는 신기할 정도로 어미들은 새끼를 잘 돌본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젖먹이들에게 온 마음을 쏟다 보면 육아는 상당 부분 저절로 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손자가 중환자실 신세를 진 뒤, 딸이 병원에서 울고불고 소란을 벌인 것을 내 새끼라서가 아니라 본능 차원에서 나는 이해한다. 의료진 개개인과 논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무슨 몸싸움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생아 돌보기에 집중해야 할 간호사나 의사들 옆에서 큰 소리로 울어댐으로써 수분 동안이나마 그들의 업무에 방해가 됐던 데에 대해서는 물론 사과했어야 마땅했을 일이다.

사람의 본능이라는 건 물론 여느 동물 수준은 아닐 것이다. 사위가 제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철저히 존댓말을 하며, 그러나 의사가 즉답을 내놓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질문에 질문을 꼬리를 물고 해댄 일은 의료진 입장에서 불쾌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제 아내가 자리를 비킨 틈을 타서 의사에게 별도로 사과하고 이해를 구한 건, 순발력 있는 일련의 고도의 본능으로 평가해 줄만도 하다. 더 큰 소란으로 번지는 걸 막을 수 있었으니까.

젖먹이들을 키우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어쭙잖은 얘기지만,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엄마가 매번 최고의 답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갓난쟁이를 두고 엄마만큼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위나 딸처럼 산후 조리원 같은 곳에서 소정의 교육 같은 걸 받지 않았지만, 손자를 잠들게 하고 수유하는데 이렇다 할 어려움을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조물주가 있다면, 할아버지에게도 일정 수준의 육아 본능을 정도는 유지하도록 허여하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태그:#신생아, #손자,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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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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