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외모와 연기력. 어쩌면 배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 본다면 김아중은 출중한 외모에, 그 흔한 '발연기' 논란에 휩싸인 적도 없으니, '다 가진 배우'라 할 만 하다. 상복도 많다. 신인상부터 여우주연상, 인기상... 김아중이 아직 받지 못한 상을 꼽는 게 더 빠를 것이다. 20대의 김아중은 누구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스타이자 배우로 안착했다.

하지만 김아중은 이때 "겁도 많고 자신감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미녀는 괴로워> 이후 심리적으로 위축돼 카메라 울렁증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하니, 호된 슬럼프를 겪은 셈이다. 

지독한 슬럼프에서 빠져나온 뒤, 30대의 김아중은 더 강하고 노련해졌다. 겁은 덜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 생각과 주관을 채워 넣었다. 주위의 시선이나 비난에 상처받기보다, 스스로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개선해 나갈 용기, 자신감도 생겼다고. 김아중은 "그러면서 일도 더 재밌어졌다"고 털어놨다.

김아중이 '민폐' 된 적 없는 이유 

 김아중 <명불허전> 종영 인터뷰 제공사진.

김아중은 '장르물의 여왕'으로 불린다. 멜로라곤 1도 없었지만, 캐릭터가 돋보이는 주체적인 역할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 킹엔터테인먼트


한국 장르 드라마의 효시라 불리는 <싸인>, 정치 검사들의 권력다툼을 실감 나게 그린 드라마 <펀치>, 미디어와 미디어를 소비하는 대중의 민낯을 그린 <원티드>까지. 최근작 <명불허전>을 제외하면, 김아중의 30대를 함께한 드라마들은 모두 로맨스라고는 1도 없는, '장르물'이었다.

"멜로 연기를 한 게 9년 만이더라고요. 의식적으로 장르물을 택해온 건 아니었어요. 단지 장르적 재미를 위해 끼워 맞춘 작품은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하고, 그걸 짜임새 있게 풀어내는 작품을 좋아해요. 사회적 메시지든, 사랑 이야기든, 코미디든 상관없이요. 그다음으로 함께 만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제가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을지를 보죠. 그때그때 제게 주어진 작품 중에서 이런 기준에 충족되고, 끌리는 작품을 택해왔어요." 

하지만 김아중이 맡은 캐릭터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그저 휩쓸리는 수동적 캐릭터가 아닌,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이건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던 <명불허전> 속 최연경도 마찬가지였다.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주 소비층이 여성들이다 보니, 이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드라마 속 남자 캐릭터는 점점 더 멋있고, 더 완벽하게 진화했다. 하지만 남자 캐릭터의 이런 '멋짐'을 부각하기 위해, 여자 캐릭터들은 때론 멍청하고, 때론 답답하고, 때론 황당한 행동을 반복한다. 남성 캐릭터에 의존적이다 못해 '민폐'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인 여자 캐릭터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김아중의 일관성 있는 선택에는 어떤 소신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되도록이면 사건 전개를 위해 여성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쓰는 작품이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리는 작품을 택하려고 하죠. 성적으로 대상화된 존재로 남기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하려 하고요. 하지만 이 기준만 가지고 작품을 택할 수는 없어요.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워낙 없거든요. 일단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 감독님 작가님과 상의를 많이 해요. 현장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요." 

<명불허전>에서 허임(김남길 분)이 분홍색 앞치마와 칫솔을 쓰고, 최연경이 파란색 물건을 썼던 것도 모두 김아중의 아이디어였다. 으레 스태프들이 여배우에게 분홍색 물건을, 남배우에게 파란색 물건을 가져다주는데, '왜 분홍은 꼭 여자야?'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작은 변주이기는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크고 작은 전형성을 깨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드라마 속 여자 캐릭터가 '민폐'로 전락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휘둘리면서 사건을 비극으로 초래하죠. 하지만 후회하거나 시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루틴에 빠져요. 한 번 사건을 실패로 이끌었다 해도, 이를 반성하고 바로잡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민폐가 아니에요. 하지만 많은 캐릭터들이 이런 쳇바퀴 속에 놓여있죠. 사실 사건을 탄탄하게 만들어 놓으면 누구 하나 민폐가 되지 않아도 캐릭터들이 다 살아 움직이거든요. 

그렇다고 민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극의 탄력을 위해서 민폐가 되어야할 땐 확실하게 민폐가 돼야죠. 다만 반복되는 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이런 지점에서 작가님, 감독님과 상의를 많이 해요. 제안도 하고요."

김아중은 오늘도

 김아중 <명불허전> 종영 인터뷰 제공사진.

김아중은 <명불허전> 전에 영화 시나리오 3편을 선택했지만, 모두 ‘투자 보류’됐다. ‘아직은 여성 영화에 들어갈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 킹엔터테인먼트


신인 때는 그저 주어진 기회만으로 감사해서 무조건 열심히만 연기했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원대한 포부보다는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만 있었다. 하지만 배우로 14년을 사는 동안, 김아중의 인식도 조금씩 변화했다.

"제 출세작이 <미녀는 괴로워>인데, 이 작품 이후로 선택권이 다양하고 풍족해졌죠. 하지만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느끼는 작품에 대한 갈증, 선택의 폭은 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여배우를 위한 작품이 없어요." 

사실 김아중은 <명불허전> 전에 영화 시나리오 3편을 선택했지만, 모두 '투자 보류'됐다. '아직은 여성 영화에 들어갈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극의 내러티브를 보강해라, 기획을 더 풍성하게 해라... 이런 식의 솔루션 제안이 아닌, '여성 영화라서'. 아무리 강해진 김아중이라지만, 가슴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제게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 안 해요. 정말 좋은 시나리오였고, 좋은 영화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3편 모두 무산됐어요. 이 현실을 '불만'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이런 현실에 배우 문소리는 직접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연출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특별히 가지고 있진 않아요. 다만 좋은 배우들이 놀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공동으로 개발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화, 드라마 굉장히 좋아하잖아요. 대중문화 콘텐츠에 충성도가 높은 국민들이 있음에도 시장 자체가 작으니까, 새로운 시도들이 금방금방 되지 않는 것 같아요. 100만, 200만 관객 드는 영화도 많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천만 관객 겨냥한 블록버스터 아니면 아예 저예산 영화가 대부분이잖아요. 주옥같은 여배우 4명이 모인 <더 테이블> 같은 영화도 200만 관객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 영화가 더 많아지고, 관객들도 독립 영화를 더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김아중이 꿈꾸는 내일 

 김아중 <명불허전> 종영 인터뷰 제공사진.

김아중은 영화 현장이 옳은 방향으로 바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운데에, 자신의 역할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킹엔터테인먼트


이른 나이에 스타가 됐고, 인정도 받았다. 비록 작품 선택의 폭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마음만 조금 편하게 먹는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화려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김아중은 자신의 직업, 자신이 놓인 분야에 대해 폭넓고 깊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배우였다.

"저는 다른 돌파구가 없어요. 열심히 하는 게 일 말고는 없거든요. 그래서 이 일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여배우는 마냥 행복할 수도 있는 직업이죠. 사랑받고, 하고 싶은 일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잖아요. 그래서 어느 때는 그냥 다 내려놓고 평범하게 연애도 좀 하고 스스로 돌보면서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근데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잘 안 가더라고요. 몇 년 전부터는 일이 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아요. 미쳤나 봐요. (웃음)      

일상적인 부분은 바보에 가까워요. 주위에서 '넌 네 생각이라는 게 없니?' 할 정도로, 좋은 게 좋은 거다, 주의죠. 하지만 일할 땐 예민해지고 직진이 돼요. 사실 그래죠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김아중은 여우일 거야, 남자 스태프들을 휘어잡는 데 능한 사람일 거야... 근데 전 그렇지 않거든요. 현장에서도 정확하고 명확하게 제 의사를 전달하는 편이에요. '김아중'이라는 사람을 생각했을 때 예상되는 성격이 아닌 거죠. 저 스스로도 조금은 부드럽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여전히 부족하고 더디지만,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10년쯤 뒤에는 제작 환경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김아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질문을 건네자 김아중은 꽤 오래 뜸을 들였다.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냐'고 다시 묻자, "10년... 심리적으로는 멀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에요"라며 말을 이었다.

"분명 10년 뒤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아지겠죠. 모두가 좋은 방향이 뭔지 알잖아요. 사회가 변하는 만큼, 업계 사람들도 업계 문화도, 더 성숙해질 거라 생각해요. 나이의 많고 적음, 경력의 길고 짧음 관계없이, 여자 남자 구별 없이,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는 현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억압이나 차별이 없는 현장이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에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시장이 되길 바라고요. 그렇게 업계를 변화시키는 데에, 제 역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배우로서의 꿈도 있다. 굉장히 대단한 작품을 하고 싶다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었다. 그저 꾸준히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는 배우로 살아남기를, 그러기 위해 연기가 녹슬지 않고,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연기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배우의 삶은, 흑과 백이 너무 분명하게 공존해서 '행복하다'고 딱 정의내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분명 배우이기 때문에 혼자 견뎌야 하는 고통도 있죠. 하지만 평생 다 갚지 못할 사랑도 받잖아요. 고통을 안고, 평생 받은 사랑에 감사해 하며 살아야 하는 삶... 이게 행복한 삶인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겠죠. 저요? 저는 행복해요.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좋은 감동, 좋은 여운을 줄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김아중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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